폭군님은 착하게 살고 싶어 148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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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은 연습이 늦게 끝나셨나 봐요.”

“갑자기 불이 붙어서 끊을 수가 없었어. 아주 팽팽했거든. 그렇지, 조이?”

“제가 봐 드린 거예요.”

조이가 자존심을 세우며 말했다.
클라라는 작게 한숨을 쉬더니 도로테아에게 말했다.

“황녀님, 일단 머리라도 말리고 손 다친 곳도 치료하셔야죠!”

“다치셨어요?”

“아, 검 잡다가 쓸렸는데 큰 상처는 아니야.”

검을 잡는 사람들에겐 흔한 상처여서 상처가 났다고 호들갑 떨 정도는 아니었다.
하지만 그래도 황녀이니 작게 쓸린 상처도 황궁 의사가 돌봐줘야 했다.

“잠깐 있어. 다녀올게. 클라라가 너무 성화라서.”

도로테아는 말갛게 웃고는 에단에게 잠깐 기다리라며 클라라와 방을 나섰다.
다들 에단과는 오래, 자주 본 사이이기에 그에게 필요한 것이 있으면 언제든지 말하라고 하고는 방을 나갔다.
그는 잠시 도로테아의 책상을 구경하다가, 한쪽 구석에 놓인 낯선 책을 발견했다.
우베라 식이 아닌 이국적인 제본 방식이 그의 눈길을 끌었다.

‘외국서?’

표지를 읽어보니 이국의 검술에 관한 책이었다.
어쩐지 도로테아답다고 생각한 에단은 웃으며 그 책을 집어 들었다.
그런데 책 사이에서 무언가가 툭, 떨어졌다.
다시 끼워놓으려고 바닥에 떨어진 것을 주운 그는 그를 보고 멈출 수밖에 없었다.

[여전히 친애하는 황녀님께, 테온 프리드 드림.]

편지 봉투 겉에 적힌 이름이 그의 신경을 쿡 찔렀다.
아직 편지 봉투를 뜯지 않은 것을 보아하니, 도로테아는 책 사이에 편지가 끼워져 있는 걸 알아차리지 못한 모양이다.

“…….”

에단은 차갑게 식은 눈으로 편지를 뚫어져라 쳐다보았다.

‘대체 이 안에 무슨 내용을 끄적여 놨지, 테온 프리드?’

그는 편지 봉투를 책상 모서리에 톡톡 두드렸다.

‘에단의 개과천선, 개과천선…….’

에단은 눈을 가늘게 뜨고 도로테아의 바람을 되뇌었다.
하지만.

‘아직 개과천선의 과정에 있는 것뿐이지.’

그는 결국 참지 못하고 편지 봉투를 뜯었다.
봉투 안에는 종이가 아닌 실크로 된 프리드가의 손수건이 들어 있었다.
에단은 그 손수건을 한눈에 알아보았다.
블루베리 물이 얼룩덜룩 들어 있는 손수건.

‘이걸…… 왜 테온 프리드가?’

에단의 미간이 구겨졌다.
그러나 예전과 다른 것은 손수건 위에 정갈하고 차분한 글씨체로 편지가 쓰여 있었다는 점이다.
에단은 이를 꽉 깨문 채 편지를 읽어 내려갔다.

[황녀님의 생일을 맞이한 새벽, 축하의 마음을 담아 편지를 씁니다.]

테온의 편지 첫머리를 읽는 것만으로도 불쾌해졌다.
생일 축하 편지라면 종이 위에 적어도 될 것이다. 그런데 왜 하필 이 손수건에 편지를 보낸단 말인가.

[부디 함께 보내는 선물이 마음에 드셨으면 좋겠습니다.
서점을 둘러보다가 이 책을 발견하자마자 바로 황녀님을 떠올렸습니다.

검을 휘두르는 황녀님의 모습이 제게는 꽤 인상 깊었던 모양입니다.]

에단은 테온이 왜 서점에서 황녀님을 떠올리는지 받아들일 수가 없었다.
금빛 눈동자는 멈추지 않고 다음 문장을 읽어내려갔다.

[손수건을 선물하는 것은 이별을 의미한다고 하지만 제게 이 손수건은 만남을 의미하게 되었습니다.
황녀님을 만날 때면, 늘 이 손수건이 함께였었죠.
황궁에서 처음 뵀을 때도, 별궁에서도, 프리디아에서도.]

편지를 읽던 에단의 미간이 더욱 깊게 팼다.

‘프리디아? 황녀님이 테온과 함께 프리디아에 가셨었어?’

들은 적 없는 일이다.
둘이 가서 무엇을 했을까? 단둘이 갔을까? 도로테아는 그때 테온에게 마음이 있었겠지?
에단은 그의 부드러운 은발을 거칠게 쓸어 넘겼다.
머리카락은 그의 머릿속 생각들만큼이나 복잡하게 흐트러졌다.

[황녀님께서 이 손수건을 돌려주시며 버려달라고 하셨지만 지금까지 버리지 못했습니다.
처음에는 저도 그 이유를 알지 못했습니다.
하지만 최근에 그 이유를 깨달았습니다.
그리고 이 손수건을 제 손으로 버릴 수 없게 되어버렸다는 것도요.]

에단은 턱이 바스러질 정도로 이를 꽉 깨물었다.
뒷이야기는 읽을 필요도 없었다. 죄다 질척거리는 문장뿐일 테니.

‘네 손으로 버릴 수 없다면 내가 버려주지.’

에단은 손수건과 편지 봉투를 도로테아의 서재 한쪽에 있는 벽난로로 가져갔다. 그리고 아무런 미련 없이 불구덩이에 던져 넣었다.
벽난로의 불길이 손수건과 편지 봉투에 옮겨붙으며 하얗게 잿가루를 날렸다.
에단은 눈부신 불꽃 속에서 테온 프리드의 편지가 타들어 가는 것을 끝까지 지켜보았다.
이내 하얗게 재가 되어버린 손수건은 장작더미 사이로 바스러져 사라졌다.
그때.

“에단, 레슨하러 가자.”

준비를 마친 도로테아가 서재로 다시 돌아왔다.
에단은 고개를 돌려 그녀를 보았다.
젖은 머리는 아까보다 말라 있었지만 여전히 그녀에게선 부드러운 꽃내음이 났다.
그녀의 말간 눈동자가 그를 보며 다가오라고 재촉했다.

에단은 주먹을 꽉 쥐고 성큼성큼 도로테아에게로 다가갔다.

“에단? ……읍!”

불타는 질투심을 참지 못한 그는 그녀를 벽에 밀어 넣고 입을 맞췄다.
테온 프리드가 들어갈 자리가 없도록, 그녀의 가장 내밀한 곳까지 모두 그의 이름을 새겨넣었다.
거친 그의 입맞춤에 도로테아는 숨이 멎을 것만 같았다.
부드럽게 그녀를 배려하던 키스는 온데간데없었다.

“에단……!”

잠시 벌어진 입술 틈새로 도로테아가 신음을 흘렸으나 에단은 멈추지 않았다.
당신은 내 거야. 나의 것. 이번 생에는 테온 프리드에게 당신을 보낼 수 없어.
터질 듯한 불안과 질투와 사랑이 한데 뒤엉켜 그를 거칠게 추동했다.
그녀의 입술에는 오직 나의 입술만이 허락되기를. 그녀의 뛰는 심장이 오직 나만 향하기를.

언젠가는 그녀의 존재만으로도 감사했는데, 어느새 커져 버린 욕심이 그를 괴롭혔다.
에단의 개과천선이라는 도로테아의 버킷리스트는, 조금 더 뒤에 이뤄줘야 할 것 같았다.
Chapter. 4
연회 이후로 도로테아의 이름은 나날이 높아졌다.
그녀는 매번 대신 회의에 참석할 수 있었고, 레이먼드는 그녀에게 정책적인 조언을 듣는 걸 좋아했다.

도로테아의 제안으로 제국의 전체적인 상하수도 정비 사업이 들어가고, 우편 제도가 개편되어 정착되고, 은행 기관이 완전히 독립하고 시장에서 지폐가 쓰이기 시작했다.
어려웠던 조세제도 개편은 금융 제도가 바르게 서고 황실의 소액 예치증서인 지폐가 보급되며 상당한 변화를 맞이했다.

세금 기준도 확정되면서 지방 귀족들이 추가로 거둬들이는 세금이 줄었다.
단 한 번도 그녀의 이름을 내세운 적은 없지만 여러 경로를 통해-주로 레이먼드, 테온, 에단을 통해-그녀의 생각이 실현되었다.
몇 년 사이에 제국의 모습은 눈에 띄게 변했다.
도로테아가 생각했던 유토피아와는 여전히 거리가 멀지만, 어쩌면 그에 한 발자국 정도는 다가갔을지도 모르겠다고 그녀는 생각했다.

한편, 비밀연애임에도 불구하고, 사교계엔 도로테아와 에단의 관계에 대해 소문이 파다하게 퍼졌다.
공언하지는 않았지만, 두 사람의 관계는 일 년도 지나지 않아 공공연하게 연인 사이로 확정되어 버렸다.
애초에 두 사람의 비밀연애는 불가능한 것이었을지도 모른다.

그리고 예상했듯이 도로테아는 에단을 좋아하는 여인들의 따가운 시선을 견뎌야 했다.
황녀라는 지위 덕에 익명의 협박 편지로 위협당하는 일이 없는 걸 다행으로 생각해야 할까?

오히려 더 마음고생을 하는 쪽은 에단이었다.
그는 서자 주제에 제 어미를 닮아 높은 사람 꾀어 팔자 피는 걸 좋아한다는 말을 들어야 했다.

대놓고 모욕을 당하거나 무시하거나 질투하는 자들도 꽤 있었다.
도로테아의 대외적인 지위가 올라가고 그녀의 능력과 아름다움이 드러나면서, 에단을 무시하고 도로테아에게 청혼을 하는 이들도 생겼다.
하지만 그들은 상관없었다. 청혼에는 거절의 답을 하면 그만이고, 질투는 비웃으면 그만이다.

그들은 둘만의 시간을 보내는 데 집중하기에도 바빴다.
행복감은 시곗바늘을 빠르게 돌리는 힘이 있다.
평온하고도 소소하고 행복한 시간은 아쉬울 정도로 빠르게 흘러갔다.
그리고 도로테아 밀라네어는 자신의 인생의 분기점이 되었던 그해를 맞이했다.
카르넌의 죽음이 찾아온 그해. 그리고 도로테아가 레이먼드를 죽이고 폭군의 관을 쓴 해.

“올해 빛의 정령들이 작년보다 더 아름다워요!”

“도로테아 황녀님의 각성 이후 빛의 예식이 매년 더 화려해지는 것 같군요……!”

제국의 건국일 밤. 에단은 귀족들 틈에서 미소를 유지한 채 이야기를 들으며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아름다운 빛과 모양으로 산란한 정령들이 하늘을 가득히 수놓으며 거대한 장관을 만들어내고 있었다.
건국 일마다 있는 빛의 예식에서는 제국의 건국 시기를 재현하며 황실에서 빛의 정령을 선보였다.

회귀 전과 달리 도로테아는 이제 빛의 예식에서 가운데의 자리를 차지하고 정령을 다루는 어엿한 밀라네어가 되어 있었다.
그가 준 힘이 도로테아의 손을 흘러 하늘을 채웠다.
에단은 도로테아가 정령석과 공명하는 것을 느끼며 아름다운 밤하늘을 감상했다.
* * *

“에단!”

예식을 마치고 옷을 갈아입고 온 도로테아가 그가 기다리던 분수대 옆으로 달려왔다.
제국 건국일에 입는 하얀 치맛자락이 그녀의 금빛 머릿결과 함께 넘실대며 휘날렸다.
그 모습에, 에단은 다시 한번 도로테아와 사랑에 빠졌다.

“황녀님.”

“올해도 고마워, 에단.”

빛의 예식에서 정령을 다룰 수 있는 것은 모두 그에 덕이니, 도로테아는 오늘 새삼 그에게 더 감사해서 뺨에 입을 맞췄다.
그와 함께 시간을 보낸 지 몇 년이 지났는데도 그녀는 여전히 이 사랑이 좋았다. 그리고 그것은 에단도 마찬가지였다.

“가실까요?”

에단이 팔을 내밀며 묻자 도로테아가 흔쾌히 그의 팔짱을 꼈다.
늦은 저녁, 빛의 예식이 끝나고 이제부터 진짜 축제의 시작이었다.
건국일은 낮과 밤의 길이가 같은 날로 우베라의 뿌리인 빛의 정령과 어둠의 정령을 기리며 밤을 새워 불을 켜고 즐기는 풍습이 있다.

거리에는 상점들이 밤새 열려 있었고, 광장에는 불을 피우고 밤새 가무를 즐기는 사람들이 활기를 불어넣었다.
도로테아와 에단은 에피스테메 인근의 번화가로 향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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