폭군님은 착하게 살고 싶어 145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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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정도 욕심은 가지셔도 돼요. 황녀님.”

에단이 도로테아에게 말했다.

“이따금 황제 입장에 서서 이런 것들을 하면 좋겠다…… 하고 생각이 들어.”

도로테아가 작게 비소를 터뜨렸다.
그녀는 이따금 자신이 황제가 되기라도 한 듯, 몰두해서 우베라의 일을 고민하곤 했다.
상하수도 정비 사업도 해야 할 것 같고, 소외되고 있는 기술 개발 쪽에도 눈길을 주고 싶고.
잘 억눌러왔다고 생각했던 욕심들이 그녀의 일상 구석구석을 채웠다.
황제로 실패해 봤으면서 또다시 그런 생각들을 하는 자신을 발견하면, 도로테아는 가끔 깊은 환멸을 느끼기도 했다.

“대신 회의 때 정말 하고 싶은 말이 많았어. 근데 못했어…….”

“알아요, 황녀님.”

당신이 말로 뱉지 못하고 글로 적어 감춰둔 생각들을 나는 보았으니까.

“아직도 이 깊은 곳에 황제가 되고 싶은 욕심을 다 버리질 못했나 봐.”

도로테아는 자신의 가슴팍을 꽉 쥐었다.
레이먼드의 자리가 부러워 빼앗고 싶은 게 아니다. 오만하게 황제의 권력을 탐하는 것도 아니다.
우베라에 영향력을 쉽게 펼칠 수 있는 자리에서 그녀가 꿈꾸는 것들을 조금 더 적극적으로 해보고 싶을 뿐이다.
굳이 다른 사람의 입을 빌리지 않고, 목소리를 내고 싶은 욕심.

황녀가 아니라 귀족 가문에서 태어났으면 자리를 얻어 조금이라도 그 힘을 펼쳐봤겠지만, 황녀에게는 어려운 일.
천 년을 이어온 우베라는 이미 수많은 귀족이 땅을 나눠 먹어, 도로테아에게 대공 지위를 내려 줄 땅도 남지 않았다.
그러니 이런 욕심은 훌훌 털어버리고 외면하는 게 나았다.

그러자 에단이 도로테아의 머리를 쓸어주었다.
도로테아는 그의 손길을 가만히 느끼며 서 있었다.
서서히 술기운에 우울하게 흔들렸던 마음이 안정을 찾는다.

“역시, 취한 거 같아.”

도로테아는 부러 배시시 웃으며 가라앉은 생각들을 털어냈다. 그러더니 에단을 보고 다시 물었다.

“……근데 왜 나한테 선물 안 줬어, 에단?”

취했더니 같은 주제가 되돌아온다.
그녀는 선물을 주지 않은 게 꽤 마음에 걸렸던 모양이다.
에단은 그런 도로테아가 사랑스러웠다.

“끝나고 다른 사람들이 없는 곳에서 드리려고 했어요.”

“그럼 미리 얘기해 줬어야지……. 그것 때문에 속상해서 취할 때까지 술을 마셔버렸잖아.”

도로테아가 그의 가슴을 한 대 툭 때렸다.
힘을 빼고 때린 솜 주먹에 그의 심장은 강타를 당한 듯 욱신거릴 정도로 세게 뛰었다.

“그래서…… 선물이 뭔데?”

도로테아가 재촉하듯 묻자 에단이 잠시 망설이더니 그녀의 손을 잡았다.

“따라오세요.”

그는 도로테아의 손을 잡고 어딘가로 걸음을 옮겼다.
그들은 사람들이 남아 있는 연회장에서 점점 멀어졌다.
* * *
회귀 전에 이미 황궁을 누벼보았던 에단은 능숙하게 기사들과 사람들 눈을 피해 어느 정원으로 들어갔다.

불 하나 밝혀 있지 않은 어두운 정원은 관목과 높은 나무들로 둘러싸여 밖에서는 안이 제대로 보이지 않는다.

해가 지고 그늘까지 짙게 드리운 탓에 정원엔 스산한 분위기마저 감돌았다.
도로테아는 연회장을 이렇게 빠져나가도 되나 싶었지만, 에단과 함께 비밀스럽게 도망치는 것 같아 기분이 묘했다.
정원 한가운데엔 작고 하얀 돔형의 가제보가 있었다. 에단은 도로테아를 가제보에 앉혔다.

“잠시만 눈 좀 감아 보시겠어요?”

에단의 말에 도로테아가 순순히 눈을 감았다.
그러자 바스락거리며 움직이는 자잘한 소리가 귓가에 들려왔다.
조금 시간이 지난 후에 에단이 다시 그녀를 불렀다.

“이제 눈 뜨셔도 돼요.”

에단의 허락에 도로테아는 조심스레 눈을 떴다.
그러자 그녀의 앞에는 믿기지 않을 만큼 황홀한 풍경이 펼쳐졌다.
정령들이 수놓은 정원엔 스산하던 기운은 눈 녹듯 사라지고 화사한 빛들로 반짝이고 있었다.
어둠 속에 잠들어 있던 꽃이 만개하고, 암흑으로 덮여 있던 조각들의 윤곽이 드러났다.

마치 하늘에 떠 있는 별들을 이곳 지상으로 가지고 내려온 듯 반짝거리는 루미나리에.
카르넌과 레이먼드의 힘으로도 만들 수 없는 빛의 정령의 향연.
그리고 그 가운데엔 무엇보다 환하게 빛나는 에단이 바이올린을 들고 서 있었다.
도로테아는 마치 환상 속에 들어와 있는 기분이 들었다.

“저의 황녀님께 이 곡을 바칩니다.”

그는 무대에 오른 악사처럼 정중하게 인사를 올린 뒤 바이올린에 활을 얹었다.
도로테아는 하나밖에 없는 청중으로서 소임을 다해 박수를 쳤다.
그가 천천히 나비의 날개를 펼치듯 활을 부드럽게 움직이자 농후한 음이 흘러나왔다.
바이올린의 선율이 귀를 휘감듯 끈적하면서도 유혹적으로 소리가 흘러나왔다.

술기운 때문일까? 아니면 별이 내려앉은 밤에 몽환적인 빛 때문일까?
도로테아는 바이올린 연주를 듣는 것뿐인데도 그와 한 침대에 누워 있는 기분이 들었다.
그가 그녀의 허리를 감싸 안고, 뜨겁게 입을 맞추고, 황홀한 별이 하늘을 수놓고, 그와 한 몸이 되는 듯한 선율.

그리고 그의 음악에 맞춰 작은 빛의 덩어리들이 춤을 추듯 물결처럼 움직였다.
도로테아는 술에 취한 건지 음악에 취한 건지 모를 정도로 그 시간에 푹 잠겨 버렸다.
그의 연주는 둘만이 아는 밀어로 쓰인 편지 같았다.

에단은 그녀에게 다가와 바이올린으로 귓가에 은밀한 언어를 속삭이다가 멀어지곤 했다.

도로테아는 태어날 때부터 그 언어를 알고 있던 사람처럼, 배운 적도 없는 그 말을 곧잘 알아듣고 행복해했다.
그리고 새삼 에단이 영리한 이임을 깨달았다.
폭군으로서 모든 것을 가져본 그녀에겐 그 어떤 보석도, 귀한 음식도 특별하지 않으리라.
하지만 그가 선물하는 이 순간은 도로테아가 단 한 번도 받아본 적 없는 사랑이었으며 감동이었으며 삶의 이유였다.

그리고 짧은 한 토막에 불과한 이 시간은 그녀에게 흉터를 남긴 과거의 토막들을 덮을 만큼 짙고 또렷하고 자국을 남길 터였다.
끝나는 게 아쉬울 정도로 아름다웠던 연주가 끝나고, 에단은 무대에서 공연을 마친 사람처럼 다시 정중히 인사를 올렸다.

“이런 곡은 처음 들어.”

“당연하죠. 황녀님을 위해 특별히 쓴 곡이니까요.”

에단이 생긋 웃으며 곡을 헌사하는 의미로 그녀의 손등에 입을 맞췄다.
그는 가끔 곡을 창작해서 연주하고는 했지만, 작곡에 취미가 있지는 않았다. 작곡에 재능이 있다고 생각한 적도 없었다.
하지만 도로테아를 보고 있으면 세상에 아직 존재하지 않는, 그의 감정과 진심을 오롯이 담은 곡을 들려주고 싶었다.

그래서 에단은 처음으로 곡을 썼고 도로테아 앞에 초연한 것이다.
뮤즈, 에단이 도로테아로부터 배운 단어.
그에 도로테아는 코끝이 저릿했다. 눈물이 날 것 같았다. 이게 다 술에 취한 탓이다.
도로테아는 취기에 흐물흐물하게 허물어졌다.

“좋아해, 에단.”

도로테아는 허물어진 벽을 넘어 흐르는 감정을 내뱉고 말았다.
그에 에단의 눈이 커다랗게 동그래졌다가, 참지 못하고 도로테아를 품에 안았다.
자신을 좋아한단다, 도로테아가.
더 무엇이 필요할까?
에단이 그녀를 당겨 안자, 도로테아는 저항하지 않고 그의 품에 폭 기댔다.

그와 함께 도로테아에게서 달큼한 술 향기가 올라왔다.
맙소사. 어떡하지? 이대로 도로테아를 들고 나르고 싶은데.
에단은 그 술 향기에 취해 버릴 것 같았다.

“네가 인기가 없었으면 좋겠어, 에단. 네가 조금만 더 못생겼으면, 아니, 많이 못생겼으면 좋겠어. 지금은 너무 잘생겨서 인기가 많을 수밖에 없잖아…….”

도로테아가 그의 가슴팍을 파고들며 말했다.
에단은 정신이 혼미해져서 이러다가 돌이킬 수 없는 짓을 해버릴 것만 같았다.
그는 도로테아가 그의 몸에 흡수되길 바라는 것처럼 꽈악 끌어안았다.

“저는 황녀님이 테온 프리드랑 말 한마디도 안 나눴으면 좋겠어요.”

그는 술 취한 도로테아에게 진심을 털어놓았다.

그러자 도로테아는 그의 가슴팍에 묻었던 고개를 들어 그를 올려다보았다.

“테온 프리드보다…… 제가 더 좋으세요?”

안다. 이런 질문이 얼마나 구질구질하고 구차한지.
하지만 어쩔 수 없다. 도로테아의 첫사랑이자 한 인생을 다 바쳐 사랑한 남자가 지금 그녀를 좋아하는 것 같은데 어떻게 신경이 안 쓰이겠어.
내가 테온으로부터 도로테아를 지켜낼 만큼 매력이 있는지, 능력이 있는지 자신이 없는데…….
테온 프리드에 한해서는 지독하게 열등감을 앓는 그였다.

“에단, 나 오늘도 계속 너만 신경 썼어.”

도로테아가 짐짓 엄숙한 표정을 지으며 대답했다.
오늘 연회에 분명 테온도 와 있었는데, 연회 내내 그녀의 시선은 에단에게로 자석처럼 이끌려갔다.
결국 밖으로 자리를 피하는 에단의 뒤까지 졸졸 따라와 이렇게 투정이나 부리고 있는걸.
테온이 언제 돌아갔는지도 모르겠는데…….

“네가 너무 좋아서 나만 봤으면 좋겠어. 근데 그러면 안 되는 거잖아……. 그러면 옛날이랑 달라진 게 없잖아.”

도로테아의 말이 다시 작아졌다.

“네가 나를 싫어하게 될까 봐 무서워.”

도로테아는 회귀 전, 카르넌이나 테온에게 사랑을 구걸하던 추한 모습이 그대로 겹쳐질까 봐 두려웠다.
그러다가…… 에단도 어린 애처럼 철없이 사랑만 갈구하는 그녀의 모습에 질려 떠나버릴지도 모르는 일이다.
그러자 그녀의 위에서 ‘하아’ 하고 깊은 한숨 소리가 들렸다.
그 소리에 도로테아는 그의 옷깃을 더욱 꼬옥 쥐었다.
그러자 에단이 그녀의 고개를 들게 했다.

“황녀님은 정말 절 미치게 만들어요.”

연회가 끝나기 전까지는 정말 참으려고 했는데.
에단은 도로테아의 입술을 탐해 버렸다. 술 때문인지 그녀의 입술은 그 어느 때보다 달아서 어지러울 정도였다.
그러자 도로테아가 역으로 그를 파고들었다. 술에 취한 것에 기대어 더 과감하게 그를 들이켰다.
불안함이 고였던 서로의 타액을 삼키며, 그들은 혀끝으로 관계의 고리를 더욱 단단히 얽어맸다.

다른 생각 할 필요 없이 너는 나를, 나는 너를 사랑할 따름이다.
그렇게 서로에게 속삭였다.
그들은 자신의 감정을 또렷하게 자각하고 새겨넣을수록, 서로의 숨결이 깊이 얽히면 얽힐수록 갈증을 느꼈다.
이것만으로는 부족해.
두 사람은 갑갑했다. 그녀를 옭아맨 드레스의 잘록한 허리도, 그를 옭아맨 베스트의 빳빳한 가슴도.
아름다운 옷도 서로의 숨결을 더욱 깊이 삼키기엔 걸림돌이 될 뿐이었다.
당신이 조금 더 필요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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