폭군님은 착하게 살고 싶어 144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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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그는 품에서 깜짝 선물을 꺼내지도, 하인을 불러 선물을 가져오게 하지도 않았다.
그리고 그녀를 향해 눈웃음을 씨익 짓더니 목례를 하고는 자리를 다른 이에게 넘겨주었다.
그녀의 곁을 지나가는 에단의 손끝이 아무도 몰래 도로테아의 손끝을 스쳤다.
도로테아는 그의 은밀한 신호에 손가락에 찌릿 전기가 올랐다.

무슨 뜻일까?
그의 생각을 읽을 수가 없어서 도로테아는 안달이 났다.
그러나 에단은 수수께끼 같은 미소만 남기고는 사람들 사이로 섞여 들어갔다.
* * *
카르넌이 그녀를 모든 귀족에게 일일이 인사시키는 순서가 끝나자, 곧 그녀의 생일을 축하하기 위한 커다란 3단 케이크가 홀 안으로 들어왔다.

케이크 트레이를 밀고 들어온 건 다름 아닌 포였다.
케이크가 어찌나 큰지 키가 큰 편이 아닌 포가 그 뒤에 쏙 가려질 정도였다.
케이크의 가장 위층에는 포의 시그니처라고 할 수 있는 사과로 만든 장미꽃이 있었다.
새벽에 레이먼드와 케이크를 만들고도 이것까지 작업한 걸까?

케이크 트레이가 홀 중앙에 멈추자 포의 동그란 얼굴이 케이크 옆으로 쏙 삐져나왔다.
그의 말간 녹색 눈동자가 도로테아와 마주쳤다.
그는 주근깨가 있는 동그란 광대를 볼록하게 올리며 말갛게 미소 지었다.

“생신을 진심으로 축하드립니다, 황녀님!”

포는 케이크를 올리며 깊이 허리를 숙였다.
도로테아는 이상한 기분이 들었다. 조그맣던 포가 이렇게 커서 황실 연회에 케이크를 올릴 정도가 되다니.
어머니가 있어 본 적이 없어서 모르겠지만, 일반적으로 말하는 어머니의 마음이 이런 걸까?
도로테아가 흐뭇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이며 감사를 전하자 제 몫을 다 한 포는 후다닥 귀족들 뒤로 물러났다.

카르넌은 도로테아에게 케이크 칼을 쥐도록 했다.
홀의 중앙, 사람들에게 둘러싸인 도로테아가 케이크를 자르자 모두가 동시에 술잔을 들어 올리며 그녀를 축하했다.

“생신 축하드립니다, 황녀님!”

도로테아는 일부러 장미꽃이 상하지 않게 케이크를 잘랐고, 장미꽃이 있는 부분을 자신의 접시에 덜게 했다.
케이크 커팅식이 끝나자 곧 악단의 연주와 무용수들의 공연이 이어졌다.

사람들은 케이크와 음식을 즐기며 공연을 구경했다.

“폐하, 이제 가보셔야 합니다.”

공연의 1막이 끝나자 카르넌의 보좌관 로버트가 말했다.
카르넌의 목적은 도로테아의 입지를 보여주는 데 있었으므로, 그가 오늘 연회에서 할 몫은 끝난 것이다.

“조금 더 즐기도록 해라, 도로테아.”

그는 도로테아에게 연회의 가장 높은 자리를 물려주고 연회장을 빠져나갔다.
황제가 빠진 후에도 연회는 계속되었다.
* * *
연회 내내 도로테아의 손에는 술잔이 들려 있었다.
대체로 붉은 와인 잔이었으나 때때로 사과 향이 나는 샴페인 잔이기도 했다.
그녀는 건배를 하거나 지나친 관심 속에 바싹 마르는 입술을 와인으로 축여야 했다.

하지만 연회가 이어지는 와중에도 도로테아가 가장 신경 쓰는 것은 하나였다.
에단 브론테. 그녀의 생일 연회에서마저 인기가 많은 사람.
그녀를 위한 음악이 연주될 때도, 아름다운 무용수들의 춤이 연회장 중앙을 수놓을 때도 그녀는 에단과 눈을 맞추려 힐끔대기 일쑤였다.

그러다 보면 에단은 그의 금빛 눈동자를 살짝 굴려 그녀를 보고, 알 수 없는 미소를 흘리고 다시 시선을 돌렸다.
그 미소가 그녀를 더 안달 나게 했다.
그녀가 애타는 눈으로 바라보아도, 그는 오늘따라 그녀와의 ‘비밀연애’에 무척 성실하게 임했다.
그는 그녀에게 와서 툭 말을 걸었다가 의심을 받기 전에 사라졌다.

간단한 대화, 짧은 눈 맞춤, 잠깐의 스침.
그는 뜨겁게 눈을 맞추다가도 다른 이가 부르는 소리에 미련 없이 시선을 돌려버렸다.
사람들에게 쉽게 둘러싸이는 그는 도로테아 없이도 반짝거리며 빛났다.
도로테아는 그런 에단이 야속했다.

‘이럴 거면 비밀연애 안 할래.’

좀 더 아는 척해 줬으면 좋겠어. 좀 더 가까이 오래 있어 줬으면 좋겠어. 다른 사람들 말고, 내 곁에 있었으면 좋겠어.
그렇게 생각하던 도로테아는 문득 자신이 지나치게 유치해져 가는 것을 느꼈다.
그녀는 와인 한 잔을 비우며 고개를 저었다.

‘에단에게 너무 매달리면 안 돼, 도로테아.’

그녀는 어른스러운 사랑을 하고 싶었다.
이미 처절하게 매달려 사랑을 되레 증오로 바꾼 적이 있지 않던가.

구질구질하고 유치한 사랑은 싫다. 그러니 에단처럼 비밀연애를 해낼 줄 알아야 성숙한 사랑이 가능할 것이다. 참고 믿음으로 기다리면서…….
그때 술잔을 든 채 에단에게 접근하는 한 영애가 눈에 들어왔다.
아까부터 에단의 주변을 돌던 영애는 마치 실수인 척 에단에게 다가가더니 그와 툭 부딪쳤다.

“어머!”

에단의 옷에 와인을 쏟은 영애는 놀란 척하며 에단을 붙잡았다.

“죄송해요! 어떻게 하면 좋아!”

그녀는 손수건을 꺼내어 에단의 옷을 적신 와인을 닦아내려 했다.
그 모습을 본 도로테아의 손에 힘이 들어갔다.

“괜찮습니다. 누구나 실수는 하는 법이니까요.”

에단이 그 영애에게 생긋 웃으며 손을 떼어내곤 자신의 손수건으로 옷을 닦아냈다.
도로테아는 그런 에단을 보며 괜히 화가 났다.

‘웃지 마, 에단. 웃어주지 말라고!’

연회장에서 버럭 화를 내며 일을 키우는 것도 문제이지만, 게다가 에단은 사교계에서 친절하기로 소문이 나 있었지만, 도로테아는 그가 오늘만큼은 나쁜 사람이길 바랐다.
영애한테 신경질을 부리면서 밀치기라도 했으면.
그렇게 생각하던 도로테아는 자신이 문득 못된 생각을 하고 있음을 깨달았다.

‘에단에게 실수한 사람을 밀치라니! 이성을 잃었구나, 도로테아! 질투하면 안 돼.’

도로테아는 옆에 있던 새 와인을 집어 다시 벌컥벌컥 들이켰다.
한편 와인을 엎지른 영애는 에단의 곁을 떠나지 않았다.

“그래도 일단 재킷이라도 벗어주세요. 제가 하인을 시켜서…….”

“괜찮다고 말씀드렸습니다.”

에단은 그의 재킷을 붙잡는 영애의 손을 떼어냈다.
칼 같은 거절에 영애가 당황하는 사이, 그는 직접 재킷 벗었다.
그러자 그의 몸에 딱 맞게 떨어진 푸른 베스트와 하얀 셔츠가 드러났다.
재킷 아래에 감춰져 있던 그의 몸매가 샹들리에의 조명 아래 드러나자 그를 보고 있던 사람들이 일순 말을 멈췄다.

보통은 옷이 날개라고 하지만, 에단 브론테에 한해서는 옷이 몸매의 덕을 본다고 해야 할 것이다.
에단은 와인에 젖은 재킷을 브론테 가의 하인에게 건네고, 약간 젖은 셔츠의 소매 부분을 살짝 걷어 올렸다.

“이렇게 하면 됩니다.”

“아…….”

에단이 넋을 놓고 있는 영애에게 그렇게 말하고는 멀리 서 있는 도로테아를 향해 눈을 돌렸다.
긴 속눈썹 끝에 걸린 시선, 의미심장하게 번지는 그의 미소.
그와 눈이 마주친 도로테아는 심장이 쿵쿵 뛰었다.
심장은 뭘 했다고 뛰는 건지……!
도로테아는 열이 오르는 속을 진정시키기 위해 옆에 있던 와인을 삼켜야만 했다.

* * *
연회는 해가 저물 때까지 이어졌고, 시간이 지나 집으로 돌아가는 이들이 생겼다.
다른 자리였다면 적당히 하고 돌아갔겠지만, 에단은 오늘 연회의 끝까지 버틸 생각이었다.

많은 이가 사라져 연회장은 한산해졌고, 끈기 있게 남아 있는 이들조차 술에 취해 어수선했다.

에단은 취한 이들을 피해 잠시 연회장 바깥의 정원에서 바람을 쐬기로 했다.
술 취한 이들을 상대하기 싫은데도 아직 남아 있는 이유는 단 하나.
그는 도로테아를 독차지할 시간을 기다리고 있었다.
카르넌이 도로테아를 위해 생일 연회를 연 바람에 데이트는 불가능해도, 연회가 끝난 뒤, 도로테아와 단둘이 시간을 보낼 틈을 마련할 계획이었다.
그런데.

“에단…….”

꼬옥, 그의 소매를 붙잡는 손.
일부러 인적 없는 외진 곳으로 나와 있는데 누가 또 뒤를 따라온 걸까, 생각하며 고개를 돌려보니 도로테아였다.

“황녀님……!”

에단은 놀라 그녀의 손을 붙잡았다.
그러자 도로테아는 그를 올려다보며 입술을 움찔거리더니 그의 소매를 잡아당겼다.

“왜 나 모르는 척해……?”

도로테아가 고개를 들어 빤히 그를 보았다.
조금 흐트러진 그녀의 발음. 발갛게 익은 뺨은 그녀가 취했음을 알려주었다.

“모르는 척이라니요.”

“모르는 척했잖아. 완전 남인 것처럼 굴었잖아…….”

도로테아가 그의 소매를 흔들며 그를 탓했다.
어쩐지 울먹이는 듯한 그녀의 목소리에 에단은 당황했다.

“그건 저희가 다른 사람들 앞에서 관계를 숨겨야 하니까…….”

“나한테 선물도 주지 않고…….”

도로테아는 입술을 꾹 물더니 고개를 그의 팔뚝에 폭 박아버렸다.
그에 순간 에단은 솟구치는 욕망을 주체하지 못할 뻔했다.

“황녀님, 취하셨어요?”

“그래, 취했어. 그런데 취한 사람은 안 취했다고 한댔어. 그러면 나는 안 취한 거야?”

도로테아가 그의 팔에 이마를 기댄 채 중얼거렸다.
혀를 꼬지 않고 또박또박 말하려는 그녀의 발음에 에단은 미칠 것 같았다.
애써 모른 척하며 연회 내내 버텼는데 마지막에 이러기야?

“있지. 나는 취하면 우울해져, 에단.”

“알아요, 황녀님.”

회귀 전에, 폭군 도로테아는 낮에 성대한 자리를 열어 술을 마시곤 밤에는 우울감에 허덕이곤 했다.
한두 잔만 마시면 기분이 적당히 좋아지는데, 그 선을 넘어버리면 무서울 정도로 가라앉아 버렸다.
회귀 전에는 자주 마시던 술을, 회귀 후에는 한두 잔만 마시고 그친 이유는 다 그 때문이었다.

자신을 잘 알기에 지금까지는 그 선을 잘 지켜왔는데…….
다 에단 때문이다. 하루 종일 사람 마음을 들었다가 놓았다가 애타게 만들고.
도로테아는 괜히 투정을 부리며 술 때문에 찾아온 우울감을 에단에게 털어놓았다.

“마음이 편해졌나 봐. 욕심이 생기는 거 있지.”

도로테아가 고개를 숙이며 중얼거렸다.
회귀 직후에는 모든 게 두렵고 힘이 빠져서 도망치기 바빴는데 서서히 삶이 눈에 들어오기 시작했다.
그녀는 살고 싶어졌다.
한때는 죽어도 그만, 아니, 응당 죽어야만 한다고 생각했던 이 형벌 같은 삶이 이제는 좋았다.
그녀는 자신의 삶을 사랑하게 되어버렸고, 내일을 기대하는 법을 기억해 내고 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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