폭군님은 착하게 살고 싶어 143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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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단이 도로테아를 볼 때마다 점점 더 결혼에 대한 욕망이 강해지는 건 이 불안함 때문일지도 모른다.
나의 아내, 나의 부인, 나의 여자라고 세상에 공표하면 더는 불안하지 않을 것 같아서.
풍문으로만 유추되는 비밀연애 따위로는 불안감을 잠재울 수 없어서.
하지만 술집 여자 밑에서 태어난 서출이 황녀의 옆자리에 앉기 위해서는 넘어야 할 산이 많다.

에단의 시선이 일순 향한 곳, 황제 카르넌. 그는 절대로 도로테아를 에단에게 허락하지 않으리라.
그 반대와 비난 앞에서 그녀를 끝까지 붙잡을 수 있을까? 만약 나 때문에 그녀가 비난을 받거나 힘들어지거나 지치면?
그렇기에 에단은 도로테아 곁에 있으면서도 테온 프리드의 존재가 늘 불안했고, 필사적이었다.
사랑받기 위해서, 사랑을 지키기 위해서.
수많은 생각이 에단의 머릿속을 채운 사이, 테온이 입을 열었다.

“제 선물에 관해선 에단 님이 상관하실 바가 아닌 것 같습니다.”

테온의 딱딱한 반응에 에단은 그 선물에 더 상관하고 싶어졌다.

“얄팍한 호감 따위로 황녀님을 흔들지 말라고 말씀드렸을 텐데요.”

에단이 싸늘하게 말했다.

“얄팍한 호감이 아니라면요?”

“무덤에 묻어버리세요. 두터운 호감이든 연정이든.”

에단이 테온에게 이를 드러내자 테온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곁에서 그 모습을 지켜보던 줄리아의 눈이 동그래졌다.
그녀 앞에 있는 건 사교계에서 친절하고 사근사근하기로 유명한 에단 브론테다.
또한 그녀 옆에 있는 건 늘 차분하고 조용하던 테온 프리드다.
그런데 지금 그 두 사람은 마치 다른 사람 같은 표정으로 서로를 노려보고 있었다.
줄리아의 시선을 눈치챘는지 에단은 차갑게 굳었던 표정을 풀며 부드럽게 웃었다.

“농담입니다. 선물은 직접 전해야 예의지요.”

“에, 에단 님도 그럼…….”

“물론 직접 전해드릴 생각입니다.”

줄리아의 버벅거림에 에단이 고개를 가볍게 끄덕였다.
그에 줄리아가 입을 틀어막았다. 그녀는 확신했다.
테온이 도로테아에게 청혼을 거절당한 게 바로 저 에단 브론테 때문인 것을!
맙소사! 황녀님과 에단 브론테가 교제한다니!
물론 많은 이가 두 사람의 관계를 의심하고 추측하며 떠들어댔지만 확신하지는 못했다.

에단이 한동안 다른 영애들과도 어울려 다녔으니, 황녀님과 교제 중이라면 절대로 그렇게 다른 여자들과 어울려 다닐 수는 없을 거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런데…… 그런데!

줄리아가 놀라 눈을 끔뻑이며 에단을 쳐다보자 에단이 눈웃음을 지어 보였다.
어디 가서 말하고 다니지 말라는 의미.
줄리아는 멍하니 고개를 끄덕였다.
줄리아라면 테온을 위해서라도 이 이슈를 떠벌리고 다니진 않을 것이다.

“그럼 이만, 황녀님을 뵈러 가셔야겠군요.”

에단이 고개를 돌려 도로테아 쪽을 쳐다보았다.
마침 도로테아도 세 사람이 서 있는 쪽을 바라보고 있었다.
에단은 테온이 도로테아에게 먼저 인사하도록 순서를 양보할 생각이었다.
테온보다 나중에 인사를 해야 그가 도로테아에게 뭘 줬는지, 무슨 얘기를 했는지 확인할 수 있으니까.

‘생일 축하는 내가 먼저 해드렸고.’

연회장에 들어오시기도 전에.
에단은 테온을 일일이 신경 쓰며 견제하는 자신이 유치하다고 생각하기는 했으나, 어쩔 수 없었다.
테온 프리드에 관해서는 마음이 불안해 미치겠는걸.
그럼에도 에단은 불안감을 감추고 여유 있는 척 테온에게 고개를 까딱여 인사하고 누구보다 기품있고 우아한 걸음으로 그 자리를 빠져나왔다.
* * *

“폐하, 프리드가의 장남 테온과 델레바인가의 줄리아입니다.”

테온과 줄리아가 다가오자 보좌관 로버트가 카르넌에게 말했다.
카르넌은 두 사람에게 꽤 좋은 인상을 받고 있었다.
젊은 귀족들 가운데서도 바르게 잘 큰 데다가 레이먼드와도 잘 어울려 다녔기 때문이다.
저들은 레이먼드의 두꺼운 지지층이 되어줄 것이다.

‘게다가 테온은 레이먼드의 보좌관이 되기도 했고…….’

카르넌은 그 사정을 이미 알고 있었다. 프리드 대공으로부터 온 밀서 때문이었다.
백 년 만에 다시 정령의 힘이 발현했다던가?
그 이야기를 전해 들은 카르넌은 테온과 도로테아의 정략혼을 추진하는 것이 어떨까 생각했다.
서로에게 도움이 되는 데다가, 프리드와 밀라네어가 더 단단히 결속할 수 있는 정치적인 계기도 되리라.

“인사 올립니다, 폐하.”

두 사람은 카르넌을 향해 예를 갖춰 인사한 뒤 도로테아와도 인사를 나누었다.

“생신 축하드립니다, 황녀님.”

“……고마워.”

도로테아는 테온과 줄리아를 향해 어색하게 웃었다. 태연하게 대해야 하는데 또 괜히 어색해진다.
도로테아는 두 사람 너머에 있는 에단을 살폈다. 괜히 그가 신경 쓰였다.

멀리서 사람들에게 둘러싸인 그는 조용히 샴페인을 마시면서도 시선은 도로테아에게 향하고 있었다.
역시, 그도 테온과 그녀가 함께 있는 게 신경 쓰이는 게 틀림없다.

“두 사람은 비교적 사이가 좋았던 것 같은데.”

그때 옆에 있던 카르넌이 도로테아와 테온을 보고 말했다.
카르넌이 아는 한 에단을 제외하면 도로테아와 가장 가깝게 지낸 사람은 테온이었다. 같이 프리디아에 여행을 간 적도 있고.

“……네.”

도로테아는 답했다.
아니라고 할 수도 없는 노릇이다.
일단 서로는 예전처럼 지내자고 말해 둔 상태이기도 하고, 테온이 레이먼드의 보좌관이 된 이상 자주 마주칠 수밖에 없으니 껄끄러운 티를 내서 좋을 건 없었다.
그때 테온의 붉은 눈동자와 눈이 마주쳤다.
테온은 아까부터 그녀를 물끄러미 바라보고 있었다.
그는 도로테아와 눈이 마주치자 머쓱하게 웃더니 자연스럽게 말을 이었다.

“선물을 미리 보내지 않아서, 지금 전해드려도 될까요?”

테온은 어쩐지 아무렇지 않아 보였다. 예전과 별다를 바 없는 그의 모습.

‘정말 괜찮나? 하긴 그가 나를 좋아해 봤자 얼마나 진심이었겠어.’

껄끄러웠다 뿐이지 오랫동안 신경 쓸 정도는 아니겠지.
도로테아는 테온의 그런 모습에 마음이 조금 놓이며 편안해졌다.

“물론이지.”

도로테아의 허락에 테온이 줄곧 쥐고 있던 선물을 그녀에게 건넸다.
다소 무게감이 있는 선물은 붉은색 포장지로 예쁘게 포장되어 있었다.

“확인은 나중에 들어가서 해주시면 좋겠어요. 여기서 공개하면 좀 부끄러울 것 같거든요.”

테온이 말했다.
도로테아는 그의 부탁에 고개를 끄덕였다.
카르넌은 두 사람의 모습을 유심히 지켜보았다.

“테온 프리드, 그러고 보니 아직 약혼은 하지 않았지?”

“예? 예, 폐하…….”

“밀라네어와 프리드는 아주 오래전부터 인연이 깊었지. 권력을 가지고 갈등하는 일 없이 서로 의지하고 도와 왔기 때문에 우베라가 지금까지 오랜 역사를 이어온 것이다.”

도로테아와 테온은 카르넌의 말 뒤에 숨겨진 의미를 알아차리고 눈을 맞췄다.
그는 두 사람이 인연을 맺기를 바라고 있는 것이다. 회귀 전에도 그랬듯이.
그러자 옆에 있던 레이먼드가 미소를 지으며 자연스럽게 끼어들었다.

“맞습니다, 폐하. 테온이 제 보좌를 맡아준 것 또한 그의 일환이겠지요.”

“테온은 에피스테메를 수석으로 졸업할 정도의 인재다. 언제까지 네 보좌관으로만 남아 있을 수는 없지.”

“평생 제 곁에 남아줄 수도 있지요.”

“테온이 환영하진 않을 거다, 레이먼드.”

카르넌이 테온을 바라보았다. 그러자 레이먼드도 웃으며 그를 쳐다보았다.

“어째서 그런 섭섭한 말씀을 하십니까? 테온, 내 곁에 평생 있어 줄 거지?”

능청스레 묻는 레이먼드에 테온은 고개를 끄덕였다.
카르넌의 입에서 테온과 도로테아의 혼인 얘기가 나와봤자 서로 불편해지기만 한다는 것을 알기 때문이다.

“평생 모시겠습니다, 전하.”

그는 레이먼드의 배려에 감사하면서도 가슴이 지끈거렸다. 도로테아에게서 순순히 물러나야만 하는 자신에.
* * *
에단은 조나단과 함께 도로테아를 대면했다.
같은 가문이라는 이유만으로 나란히 서게 된 두 사람은 황제 앞에서 사이가 좋지 않은 걸 티 내지 않으려고 했지만 서로 한 걸음 이상 떨어져 서 있었다.

조나단 브론테는 최근 겨우 람파스의 성곽 경비 관리의 말단직을 얻은 차였다.

공작가의 장남이 얻기에는 다소 부족해 보이는 직위지만, 다행히도 세리티안으로 돌아가 공작위를 물려받는 데엔 문제가 없을 것이다.

“생신 축하드립니다. 황녀님.”

“진심으로 생신을 축하드립니다, 황녀님.”

두 사람이 축하 인사를 건넬 때 카르넌과 도로테아와 레이먼드의 시선은 모두 에단 쪽을 향해 있었다.
하지만 그 시선은 에단이 평소 받던 동경이나 호의적인 관심, 호기심은 아니었다.
오히려 매섭고 냉정했다.
레이먼드는 아마 테온을 통해 도로테아와 에단의 관계를 눈치챘으리라.

그리고 카르넌 또한 두 사람의 관계를 예의주시하는 듯했다.
그 덕분에 두 사람은 대화라고 할 것도 하지 못했다.
마치 아무런 사이도 아닌 것처럼 생일 축하 인사를 건네고, 무의미한 대화를 했다.
조나단은 에단보다 더 나서고 싶어 에단에게 말할 기회를 제대로 주지도 않았고, 카르넌의 예민한 눈초리에 에단은 조용히 몸을 사렸다.

하지만 그래서 두 사람은 속으로 웃음이 났다.
아무것도 아닌 척 태연하게 마주치는 눈빛이 짜릿했고, 덤덤하고 무상하게 건네는 말이 더 간지러웠다.
그 가운데 도로테아는 기다렸다. 오늘 아침부터 내내 궁금했던 그의 선물을.
하지만 그의 손엔 아무것도 들려 있지 않았고, 그는 대화가 마무리에 접어들 때까지도 선물에 관해 이야기하지 않았다.
도로테아는 조금 초조해졌다.

‘날 위해 바이올린 한 곡 정도는 연주해 줄 줄 알았는데…….’

물질적인 선물은 바라지 않는다.
이미 물질적인 욕망은 모두 충족해 본 그녀이기에 값비싼 보석이나 장식품은 중요하지 않다.
에단이 주면 작은 콩알 하나도 의미가 되리라.
그런데 그는 끝까지 선물에 대한 언급이 없었다.

‘설마 브론테 가문에서 보내온 선물로 끝이야……?’

에단이 아닌 브론테 가문에서는 다른 가문들이 그러했듯 일찍이 그녀에게 선물을 보내왔다.
세리티안에서 사용하는 고급 화장품이었다.
귀족들 사이에서 최근 인기를 끌고 있어 상당한 가치를 지닌 물건이지만 도로테아에게는 여러 가문이 보내온 수많은 물건 중 하나에 지나지 않았다.
그런데 정말 그걸로 끝내겠다고? 브론테 공작 부부와 조나단과 함께 묶여서?
도로테아의 미간이 오목하게 좁아지며 꿍한 표정을 짓자 에단이 픽 웃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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