폭군님은 착하게 살고 싶어 139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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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자 에단은 생긋 웃으며 도로테아가 구상했던 ‘우편번호’와 ‘우표’에 대해 가볍게 흘리듯 설명했다.
큰 지역, 세부 지역, 동네별로 이니셜, 번호화 하여 우편을 한눈에 구분할 수 있게 할 것.
그리고 우편국에서 송달하는 모든 우편엔 우표를 구매하여 붙이게 할 것.

우표의 가격은 모든 지역에서 동일하게 적용되며, 거리, 소포 크기 별 부착해야 하는 우표를 체계화할 것.
별로 대단하지도 않은 방법. 하지만 이 간단한 체계화로 상당한 불편이 사라질 터였다.

‘회귀 전에는 적용하려던 도중에…… 테온 프리드가 죽었지.’

테온 프리드가 죽은 후로는 도로테아가 겨우겨우 해내려던 사소한 것조차 무산되어 결국 빛을 보지 못했다.
그런데 도로테아는 회귀 후에도 그때의 아이디어를 조금 더 구체적이고 효율적으로 개선하며 생각의 끈을 놓지 않은 것이다.
에단은 그런 도로테아를 사랑했다.

“지역별로 이니셜과 번호가 있으면 우편 분류도 훨씬 수월해지겠네요.”

우편국의 영애도 그의 말을 집중해서 귀 기울여 들었다.

“에단 브론테 님은 에피스테메를 나오지도 않았는데, 이런 총명한 면모까지 갖추셨군요.”

귀족들이 고개를 끄덕이며 그를 칭찬했다.
에피스테메 얘기만 덧붙이지 않았으면 더 좋았을 텐데.
귀족들은 또다시 에단의 구석구석을 찬양하기 시작했고, 에단은 차를 마시며 도로테아나 보러 가고 싶다고 생각했다.
* * *
도로테아의 생일이자 황후의 기일이 일주일 정도 남은 어느 날.

“황녀님, 황제 폐하께서 황녀님의 생신을 맞이해 연회를 여신대요!”

“갑자기?”

“데뷔 이후 대신들과 제대로 인사를 나눈 적이 없다고 자리를 마련해 주시려는 모양이에요!”

도로테아는 조소하며 카르넌이 또 괜한 짓을 벌인다고 생각했다.
지금까지 카르넌은 그녀를 위해 생일 연회를 열어준 적이 단 한 번도 없었다.
그녀가 람파스로 올라온 이후, 생일 선물을 보내주는 기현상은 있었지만, 연회까지는 열지 않았다.
황후의 기일에 즐거운 연회를 여는 것이 예의에 어긋났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도로테아는 올해도 당연히 카르넌이 조용히 선물만 보내올 거라고 생각했다.

“이것 보세요! 그날 입을 드레스까지 직접 보내셨어요!”

클라라는 하인들이 들고 들어오는 푸른 드레스를 가리켰다.
남쪽 바다를 닮은 색의 드레스는 보석과 레이스, 프릴로 화려하게 장식되어 있었다.
잘록한 허리가 강조된 드레스는 꽤 갑갑해 보였다. 연회 내내 아무것도 먹지 말라고 보낸 게 틀림없었다.

“여기 같이 차고 올 수 있는 목걸이와 팔찌, 귀걸이까지 함께 보내셨어요. 물론 구두도요!”

하인들이 커다란 액세서리 함을 열어 카르넌이 보내온 액세서리와 구두를 도로테아 앞에 전시했다.
눈이 부실 정도로 번쩍거리는 보석들. 그리고 리본이 달린 구두까지.
한눈에 보아도 집 몇 채 값은 될 것 같았다.

‘사치스러워.’

나한테 이런 거 보낼 돈으로 차라리 더 생산적인 일에 쓰지.
도로테아는 속으로 중얼거렸다.
하나도 달갑지 않은 선물, 달갑지 않은 행사.
평생 못 잊을 듯 애틋하게 황후를 위했으면서 인제 와서 갑자기 도로테아의 생일을 우선하는 건……. 정령 때문이겠지.
하지만 클라라는 너무나 행복하고 즐거워 보였다.

“황녀님이 잘되셔서 저는 너무 기뻐요!”

클라라는 황제가 도로테아에게 이렇게 엄청난 선물을 보내오며 연회까지 열어준다는 게 감격스러웠다.
그녀는 지금까지 도로테아가 얼마나 홀대받았는지 아주 잘 아는 사람 중 하나였기 때문이다.
클라라는 화려하고 풍성한 드레스가 도로테아에게 분명 잘 어울릴 것이라고 장담했다.
그때였다.

“이런, 황녀님께서 의상실을 여셨군요.”

에단의 목소리에 시큰둥하게 식어 있던 도로테아의 표정에 화색이 돌았다.

“어머, 에단 도련님! 오늘은 레슨도 없는 날인데 어쩐 일로 오셨나요?”

클라라가 놀라서 묻자 에단이 빙그레 웃었다.

“황녀님께 약속드린 악보를 가져왔거든요.”

옆구리에 끼고 있던 악보를 살짝 들어 보였다.

‘악보? 그런 약속을 했었나?’

도로테아가 눈을 깜빡이자 그는 도로테아를 향해 콧잔등을 살짝 찡긋하며 신호했다.
‘너무 보고 싶어서요’라고 할 수는 없으니까요.

그의 무언의 의미를 알아들은 도로테아는 새어 나오는 미소를 숨기며 고개를 끄덕였다.

“맞아, 내가 부탁했어.”

“그나저나 황녀님께서 드레스를 새로 장만하셨나요?”

에단은 자연스럽게 안으로 들어와 도로테아 곁에 서며 물었다.

“황제 폐하께서 생일 선물로 보내주셨어요. 황녀님을 위해 연회도 열어주신대요!”

“아아……. 올해는 돌아가신 황후 폐하를 추모하지 않나 보죠?”

클라라의 대답에 에단은 ‘신기하군요’라고 튀어나오려는 뒷말을 입술 안쪽으로 감췄다.

“돌아가신 지 이제 20년 가까이 되어가고, 황녀님께서도 데뷔탕트를 치르셨으니 황제 폐하께서도 황녀님을 더 챙겨주시려나 봐요.”

클라라가 에단에게 그렇게 설명하자 에단과 도로테아는 서로 눈을 맞추고 어색하게 웃었다.

“연회에 입고 갈 화려한 드레스가 필요하다고 생각하셨나 봐.”

“정말 아름답고 훌륭한 드레스이지만, 이 드레스를 입으면 목구멍에 빵 한 조각 들어갈 자리도 없겠는걸요.”

황녀님을 고문하려는 속셈이신가.
에단이 도로테아의 귀에만 들리게 중얼거리자 도로테아는 웃음을 터뜨렸다.

‘나랑 똑같은 생각을 했네.’

마음이 통한 것 같아 기분이 좋았다.

“드레스 시착해 보실 건가요?”

“……그럼 한번 봐줄래?”

드레스가 화려하고 갑갑해 보인다며 불만스럽게 여기던 도로테아였지만, 에단 앞에서라면 입어 보는 것도 괜찮겠다 싶었다.
드레스가 예쁘긴 예쁘니까, 에단에게 보여주고 싶기도 하고…….
에단은 흔쾌히 고개를 끄덕였고, 도로테아는 클라라에게 시착을 부탁했다.

세 사람은 드레스룸으로 자리를 옮겼고, 도로테아는 에단을 드레스룸 바깥쪽 소파에 앉아 있게 한 뒤 클라라와 함께 탈의를 위해 안으로 들어갔다.
드레스는 갈아입는 데 시간이 오래 걸리므로 레나스코르 궁의 하인이 에단에게 가벼운 다과를 내어주었지만, 에단은 다과에 입을 대지 않았다.

그는 오직 도로테아가 나오기만을 기다리며 자신의 손을 만지작거렸다.
도로테아가 드레스를 입고 나오는 모습을 기다리고 있자니 마치 결혼식을 준비하는 예비 신랑이 된 것 같아 기분이 묘했다.
별것도 아닌데 왜 긴장되고 가슴이 두근거리는지.
그때, 드레스룸의 문이 열리며 도로테아가 나왔다.

그 순간 에단은 소파에서 일어서지도 못하고 멍하니 시선을 고정했다.
바다처럼 푸른 드레스 위로 그녀의 하얀 팔과 어깨가 드러났고, 쇄골 위로 눈부시게 반짝이는 보석들이 별처럼 내려와 앉아 있었다.
푸른 보석이 박힌 귀걸이는 도로테아의 백금발과 대조되어 그 화려함을 더욱 돋보이게 했다.
도로테아는 오랜만에 입는 화려한 드레스가 어색한지 다소 수줍게 고개를 떨군 채 에단을 보았다.

“어때? 어울려?”

도로테아의 목소리가 귓가에 흘러들어오자, 에단은 그녀를 끌어안고 입을 맞추고 싶어졌다.
당장 나와 결혼해 달라고 이 자리에서 청혼하고 싶었다.
클라라와 다른 하인들이 보고 있지만 않았다면, 그는 그렇게 했으리라.

옷이 아름다워서이기도 했지만, 그보다 그의 마음을 떨리게 하는 건 그를 위해 드레스를 입고 수줍게 자신이 어떻냐고 묻는 도로테아였다.
역시 비싼 드레스를 입은 김에 결혼을 하는 게 맞지 않을까?

“에단?”

도로테아가 그의 이름을 한 번 더 부른 후에야, 그는 겨우 넋을 되찾을 수 있었다.

“황녀님께서는 뭘 입어도 잘 어울리세요.”

에단이 말하자 도로테아가 입술을 살짝 내밀었다.

“그런 건 그다지 요긴한 평가는 아니야, 에단.”

그럼 확 결혼하고 싶다고 말해버릴까요?
에단은 하고 싶은 말을 꾹 참고 자세히 보겠다며 자리에서 일어섰다.
그는 그녀에게 가까이 다가와 옷을 자세히 살피는 척 그녀와 눈을 맞췄다.
그녀의 팔찌를 보는 척 살짝 손을 스치고, 목걸이를 구경하는 척 그녀의 목덜미와 입술을 보며 제 입술 끝을 깨물었다.

“황제 폐하께서 아무 옷이나 보내진 않으신 모양이에요. 정말…… 정말 아름다우세요.”

“네 마음에 든다니 다행이야.”

그제야 도로테아의 입가에도 편안한 미소가 돌았다.

“그럼 이만 편한 옷으로 갈아입고 나오세요.”

에단은 도로테아의 등을 떠밀었다.

“벌써? 이렇게 보고 끝이야?”

“예쁘긴 하지만 그 옷은 갑갑하시잖아요.”

아무리 예쁜 옷이라도 도로테아가 불편하다면 사절이다.
게다가 계속 보고 있다가는 클라라고 조이고 하인들이고 다 보는 앞에서 뭐라도 저지를 것 같았으니까.

“저는 황녀님이 어떤 모습을 하셔도 사랑하니까요.”

에단은 그녀의 귓가에 작게 속삭이자 도로테아의 얼굴이 살짝 붉어졌다.

‘이럴 때 그런 말 하지 말란 말이야. 사람들에게 들키잖아!’

“그럼 다시 갈아입고 나올게.”

도로테아는 서둘러 드레스룸 안쪽으로 들어갔다.
에단은 드레스룸 안쪽으로 모습을 감추는 도로테아를 보며 생각했다.
역시, 비밀 연애하지 말자고 할까?
* * *

“그럼 두 분이 말씀 나누세요.”

도로테아가 다시 옷을 갈아입고 나오자 클라라는 응접실에 두 사람을 위한 다과를 차려놓고 눈치껏 물러나 주었다.
에단은 클라라가 나가는 것을 확인하자마자 도로테아의 손을 붙잡았다.
그의 손가락이 농밀하게 그녀의 손가락 사이를 파고들었다.

“키스, 해도 돼요?”

에단이 도로테아의 얼굴을 가까이 마주 보며 물었다.

“에단……!”

“아까 하고 싶었는데 사람들이 있어서 참았어요.”

오늘 레슨도 없는데 굳이 악보를 핑계로 찾아온 것부터가 그녀가 보고 싶어서였는걸.
그가 깍지낀 손을 바르작거리며 보채자 도로테아는 알았다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녀의 허락이 떨어지기가 무섭게 에단의 입술이 그녀의 입술 위를 덮쳐왔다.

“흣……!”

에단이 그녀의 머리를 감싸 안으며 그녀의 잇새를 파고들었다.
그는 부드럽고 다정하게 그녀를 쓰다듬었고, 도로테아는 머리가 어질어질할 정도로 달콤한 그를 맛보았다.
도로테아는 뜨거운 숨결을 삼키며 나날이 그녀의 가슴 더욱 깊은 곳에 자리 잡는 그를 느꼈다.

그녀는 에단으로부터 피아노만이 아니라 사랑하는 법까지도 배워가고 있었다.
어떻게 서로의 심장을 뛰게 하는지, 서로의 온도를 어떻게 나누는지, 삶의 소중함을 어떻게 느끼는지.

“사랑해, 도로테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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