폭군님은 착하게 살고 싶어 138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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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신 회의 후, 카르넌은 고민에 잠겼다.

“레이먼드 황태자 전하가 오늘 대신들을 훌륭히 상대하시더군요.”

보좌관 로버트는 레이먼드를 칭찬했다.
오늘 레이먼드는 거의 모든 안건에서 귀족들을 잘 다뤄냈다. 황제인 카르넌이 굳이 말을 보태지 않아도 될 정도로.
이 정도라면 황위를 이은 후에도 우베라를 잘 이끌어 나갈 수 있으리라.
하지만 카르넌의 표정은 마냥 밝지만은 않았다.

“그에 반해 도로테아는 아무 말도 하지 않더군.”

대신 회의에 도로테아가 참석한다는 말을 들었을 때, 그는 도로테아가 드디어 어엿한 황실의 일원으로서 역할을 하려나 생각했다.
하지만 도로테아는 오늘 회의 내내 말없이 회의를 지켜보기만 했다.

“……나의 탓인가?”

오랫동안 그녀를 돌보지 않은 채 내버려 두었고, 그 탓에 도로테아는 귀족들을 상대하는 법이라든가 사교계와 궁정의 분위기에 익숙지 않은 것일지도 모른다.

“들리는 바로는 도로테아 황녀님께서도 대신 회의를 무척 열심히 준비하셨다더군요. 레이먼드 황태자 전하와도 따로 만나 정사에 대해 논하셨다고 들었습니다.”

“그래?”

“황태자 전하께서 말씀하시기를 오늘 윤작에 관한 단초도 도로테아 황녀님께서 주셨다고 했습니다.”

“정말인가?”

“예전부터 도로테아 황녀님은 비상한 면이 있으셨잖습니까. 물론 그 비상함을 괴상함으로 바꿔 드러내시긴 했지만요.”

로버트는 도로테아가 에피스테메 입학시험을 0점 받았던 일을 떠올렸다.

“생전 처음으로 대신 회의에 참석하셨으니 대신들을 상대하기엔 아직 힘드시겠죠. 그래도 졸지도 않으시고 내내 경청하시던걸요.”

“여전히 귀족들과는 가까이 지내지 않는다고.”

“예, 그렇습니다만 브론테가의 차남인 에단 브론테와는 자주 만나신다고 들었습니다. 피아노 레슨을 받으신다더군요.”

“에단 브론테?”

카르넌은 잊을 수 없을 만큼 아름다운 그를 기억하고 있었다.

“서자가 아니던가?”

“예, 하지만 세리티안에서부터 도로테아 황녀님과 가까이 지낸 사이라고 들었습니다.”

그러고 보니 친구라고 했던가. 어릴 때부터 알던 사이이니 가까이 지낼 수는 있지만…….

“에단 브론테는 뒷소문도 많다던데.”

카르넌이 미간을 구기며 말했다.
황제인 그도 알 만큼 에단에 대한 소문은 람파스 내에 파다하게 퍼져 있었다.
어느, 어느 가문의 여인이 상사병에 걸렸다더라, 어느 가문의 여식과 데이트를 했다더라, 어느 사교 파티에서 주목을 받았다더라…….
아마 그는 제국 내에서 가장 유명한 서출이 아닐까?

“그 미모면 소문이 안 붙을 수가 없을 겁니다.”

“출신도 그렇고 첫인상도 썩 좋지 않아.”

“그렇습니까? 조리 있게 말도 잘하고 능숙하던데요. 물론 출신은 흠이 크지만요.”

로버트는 카르넌의 말을 의아하게 여겼다.
지난번 브론테 공작과 함께 황궁에 들어왔을 때, 에단 브론테는 카르넌 앞에서도 떨지 않고 훌륭하게 답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카르넌은 오히려 그런 점이 마음에 들지 않았다.

“그래서 속을 모르겠어.”

정교하고 훌륭한 가면을 마주하는 불쾌함.
그 젊은 나이에 능구렁이 같은 대신들과 같은 태도를 보이니 속에 무슨 뜻을 품고 있을지는 모를 일이다.
게다가 외모도 준수하니 그가 혀를 조금 휘두르면 도로테아가 금방 속아 넘어갈 것 같기도 했다.

“어쩌면 황녀와의 연줄, 혹은 그 이상을 노리고 있을지도 모르는 일이지.”

아마 브론테 공작도 그래서 서자인 에단을 공석에 보란 듯이 내놓은 것일 테고.

“황녀님은 젊지 않습니까? 아직은 충분히 그런 걸 즐기셔도 되는 나입니다.”

설마 황녀가 서자와 결혼할 리는 없고, 잘생긴 남자가 있으니 마음이 끌려 어울릴 수도 있는 거지. 지금은 좀 즐기게 둬도 괜찮다.

“하지만 에단 브론테와만 어울려 다니는 게 문제지.”

에단 말고 다른 이들도 만나야 더 넓게 볼 것이 아닌가.

“그러고 보니 도로테아가 대신들에게 제대로 인사를 돌린 적이 없었지.”

카르넌이 턱을 만지작거리며 중얼거렸다.
데뷔탕트 때 귀족들과 인사를 나누기는 했지만, 그녀만을 위한 자리는 아니었다.
레이먼드의 경우엔 어릴 때부터 카르넌이 데리고 다니며 중요 석상에서 대신들과 인사시키고 가까이 지내게 했지만 도로테아는 그런 적이 없다.

그러니 도로테아에겐 귀족들이 어렵게 느껴질 테고, 회의에서도 소외감과 벽을 느끼며 뒤로 물러나 있던 것이겠지.

‘그동안 저는 제대로 되지 못한 밀라네어였군요.’

그는 도로테아가 그를 보며 했던 말을 떠올렸다.

‘그래…….’

그는 인정했다.
도로테아를 밀라네어로 인정하고 싶지 않았다는 걸.
앨리스의 죽음과 밀라네어의 쇠락을 상징하는 그 존재를 받아들일 수 없었다는 걸.
하지만 더는 아니다.
도로테아 밀라네어는 그의 피를 이어받은 딸이고, 밀라네어의 어엿한 일원이다.
그는 도로테아가 귀족들 앞에서 맥을 못 추고 있는 모습을 바라지 않았다.

그녀가 수그리고 있는 모습에서, 마치 그의 앨리스가 기죽어 있는 모습이 보이기도 했다.
그 모습이 마음이 쓰여서 카르넌은 회의 내내 도로테아 쪽에 눈길이 갔다.

“그러고 보니 도로테아의 생일이 이제 곧이지 않았나?”

“예. 그렇습니다, 폐하.”

로버트가 미소를 띠며 답했다.
황후의 기일을 묻는 게 아니라 도로테아의 생일을 묻다니.

“그날 도로테아를 위한 자리를 마련하는 게 좋겠군.”

도로테아가 대신들 앞에 자신을 정식으로 소개하며 인사할 수 있는 자리가 필요했다.
* * *
한편, 대신 회의에 참석하지 못하는 에단은 사교계로 녹아들었다.
다행인 건 도로테아보다는 그가 사교계를 더 편하게 다룬다는 점이었다.
그는 회귀 전에도 그랬듯이 자연스레 사람들 속에 섞였다. 아니, 섞인다기보다는 도드라졌나?

이따금 귀족들과 어울릴 시간에 도로테아와 어울리고 싶다는 생각이 들기도 했지만, 그는 자신이 가진 재능을 도로테아를 위해 쓸 수 있기를 바랐다.
사교계는 그런 점에서 무척 유용했다.
그리고 한낮의 티파티에서 갑자기 우편에 관한 토론이 벌어진 것 또한 전부 에단 때문이었다.

에단이 연서나 초대장을 오직 우편으로만 받을까 한다고 운을 띄웠기 때문이다.

“우, 우편으로만요?”

“브론테 저택 앞이 늘 시끄럽고 마차들도 매번 막혀 지나가지 못해 제게 원망을 돌리더군요. 어떻게든 방안을 찾지 않으면 안 되어서…….”

귀족들은 정확한 편지 배달을 위해 자신의 아랫사람을 시켜 초대장이나 연서를 보내왔다.
때로는 직접 얼굴을 보고 주는 것이 예의라며 본인이 직접 에단을 기다리기도 했다.
그런데 갑자기 공식 우편을 통해서만 받겠다니.

“하지만 에단 님. 우편은 비효율적이에요.”

“지난번엔 우편이 잘못 간 탓에 답장을 무려 3년 만에 받았다고요. 바로 옆 동네였는데도!”

“우편비를 내지 못해 반송되는 일도 허다하다더군요. 편지 한 통을 받는 데도 어디는 1베니로도 충분한데 어디는 그 백 배인 1블랑도 모자랄 때가 있다고요. 불편하기 짝이 없어요!”

그들은 모두 제국의 우편제도에 대해 불만을 터뜨렸다.
체계성이라고는 찾아볼 수 없는 우편제도는 그 때문에 늘 착불로 부과되었는데, 우편비만 10블랑이 넘는 때도 있었다.
그 우편비를 감당하지 못하는 수신인은 그를 반송하기도 했는데, 그럼 그 값이 두세 배가 되어 발신인에게 되돌아왔다.

어마어마한 우편비를 감당할 수 없어 수신자와 발신자가 서로 편지를 반송하다가 결국 소송까지 가는 일도 있었고, 중요한 편지에 착불 요금을 지불할 수 없어 낭패를 보는 일도 많았다.
우편 요금이 어처구니없을 정도로 들쭉날쭉한 이유는 모두 우편국의 임의대로 우편 요금이 결정되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많은 경우 요금을 과하게 부과하여 우편국이나 마을 사람들, 지역 귀족의 주머니를 불리곤 했다.
그를 대비해 혹시라도 우편이 반송될 것을 우려하는 사람들은 우편 요금을 위한 돈을 우편에 동봉하여 보내기도 했다.
하지만 그것이 통용되자 이젠 도둑들 혹은 양심 없는 우편 배달부가 우편물을 훔쳐 가는 일이 발생하는 지경에 이른 것이다.
주소지도 불명확해 우편 배달이 잘못되는 일도 허다했다.

“우편 요금이 체계적으로 정해져서 발신인이 미리 지불하면 좋을 텐데요. 그럼 원치도 않는 우편물을 받느라 돈을 쓸 일도 없지 않을까요?”

에단은 차를 홀짝 들이켜며 무심하게 툭 화두를 던졌다.
에단의 환심을 사고자 하는 이들은 득달같이 그의 화두를 받아 물며 고개를 끄덕였다.

“맞습니다. 그런 엉터리 같은 제도는 없애버리든 뜯어고치든 해야 해요.”

“맞아요. 귀한 편지를 위해서라면 얼마든 지불할 수 있지만, 그걸로 누군가가 사리사욕을 채운다는 게 싫은 거죠.”

“게다가 잘못 가는 경우도 너무 많아요!”

그들도 우편 요금을 사소하지만 매우 불편한 문제로 여기고 있었다.
얼마나 제멋대로였으면 변덕스러운 것을 두고 ‘우체부 마음 같다’라고 하는 관용어도 생길까!
다만 으레 그렇게 해온데다, 귀족들은 중요한 일은 우편국을 이용하지 않고 다른 방법을 찾을 수 있었으니 굳이 트집 잡지는 않은 것이다.
하지만 불편하다는 말은 아주 오래전부터 이어온 일.
사람들의 불평이 커지자 한쪽에 있던 영애의 입이 다급히 열렸다.

“우, 우편국에서도 그 점은 잘 알고 있어요. 어떻게 개선해 볼까 고민 중이기도 하고요.”

우편국 관리직에서 일하는 영애였다.
하지만 다른 이들의 반응은 시큰둥했다.

“고민만 몇 년째 하고 있으니까 문제죠.”

“편지를 믿고 보낼 수가 있어야지, 원. 황실에서는 사소한 편지도 우편 배달부에게 맡기지 않는 지경 아닙니까?”

황실도 믿지 못하는 우편국의 위상은 땅에 떨어질 대로 떨어진 상태였다.
게다가 각 지역의 사리사욕 때문에 우편 요금은 비싸지는데, 정작 우편국으로 회수되는 금액은 터무니없이 적었다.

“간단한 문제가 아니에요. 제국은 워낙 넓고 주소도 복잡한 데다가 편지를 보낼 때 돈을 제대로 냈는지 안 냈는지 우체부가 확인할 수도 없는데 착불 외에 어떻게 하겠어요?”

“주소지를 번호하고 편지엔 돈을 냈다는 표시를 하면 되지요.”

“번호화와 표시요? 어떻게요?”

에단의 말에 모두의 고개가 갸웃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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