폭군님은 착하게 살고 싶어 137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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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순히 정령 때문만이 아니긴 아닌가 보군.’

에단은 잘게 일그러진 테온의 얼굴을 보며 생각했다.
그는 도로테아를 진심으로 소중하게 생각하고 원한다.
그는 오랜 세월을 걸친 경험 탓에 반사적으로 ‘테온 프리드를 향한 위기감’이 몰려오기도 했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기뻤다.
세상에 존재할 수 없을 것만 같았던 문장 ‘테온 프리드가 에단 브론테를 질투한다’가 탄생했기에.

언젠가 테온이 그의 목을 조르고 싶어질 정도로 질투해 주기를 바라기도 했다.
반대로 그가 아예 도로테아에게서 관심을 꺼버렸으면 좋겠다고 생각하기도 했다.
이 역설적인 감정을 뭐라고 설명해야 할까?

“프리드 대공가의 도련님께서 미천한 저를 질투해 주시다니 영광스럽습니다만, 이제 그 영광은 필요 없으니 이만 거두시기를 바랍니다. 적어도 당신보다는 제가 황녀님을 더 사랑해 드릴 자신이 있으니까요”
에단이 정중히 고개를 숙이며 웃었다.
* * *
도로테아가 테온을 다시 만난 건 예정되어 있던 대신 회의에서였다.
레이먼드의 추천으로 참석하게 된 대신 회의.

“도로시!”

반갑게 먼저 다가오는 레이먼드보다 그 뒤에 있는 테온에게 시선을 빼앗겼다.
그러니까…… 너무 신경 쓰여.
좋은 친구로 남았으면 좋겠다는 생각과 달리, 도로테아는 죄지은 사람처럼 테온을 바로 보기가 힘들었다.
그나마 다행인 것은 레이먼드가 두 사람 사이에 끼어서 막아주는 것이랄까?

“드디어 회의에 참석하는구나. 일찍부터 나와줬으면 좋았을 텐데.”

“그냥 구경하러 온 거야. 난 가만히 듣고만 갈 거라고.”

“듣는 게 어디야! 대신들 가운데서도 내내 졸다 가는 사람이 태반이거든.”

레이먼드는 입가에 손을 가져다 대며 속삭였다.
그러더니 자신의 뒤에 있던 테온을 보았다.

“그리고 여기 인사해. 내 새로운 보좌관, 테온 프리드!”

레이먼드가 테온의 등을 탁탁 두드리며 자랑스럽다는 듯이 말했다.

“안녕하세요, 황녀님.”

“안녕……. 테온.”

테온의 인사에 도로테아가 어색하게 웃었다.
레이는 어색한 인사를 나눈 두 사람을 번갈아 보았다.

‘분위기 풀기는 실패네.’

두 사람이 따로 만나는 건 영영 불가능할 것 같아서 사이에서 조금 밝게 풀어줄까 했더니 그의 ‘눈치 없이 해맑게 굴기’도 먹히지 않을 만큼 단단하게 꼬인 모양이다.

도로테아라면 이런 일에 별로 개의치 않고 쿨하게 넘어갈 것 같았고, 테온도 도로테아에게 이 정도로 진심인 줄은 몰랐는데.

‘도로시도 테온도 생각보다 섬세하다니까…….’

겉으로는 무던한 척하면서 속으로는 세상 가장 예민한 사람들이다.

“자, 그럼 들어가 볼까?”

레이먼드는 회의장의 문을 열며 꿀 먹은 벙어리가 된 두 사람을 데리고 들어갔다.
* * *
대신 회의의 가장 큰 이슈는 하르크의 통관세였다.
딱히 반대할 만한 근거와 이유가 없다고 생각했던 안건은 시간을 한참이나 잡아먹었다.

“기존의 세율을 이렇게 바꾸는 건 하르크와의 관계를 악화시킬 수도 있습니다.”

또, 또 하르크의 눈치를 보는 말.
회귀 전의 도로테아였다면 당장 책상을 엎으며 일어나 하르크가 뭐가 무섭냐고 소리치며 따져 물었을 것이다.
어차피 국제 사회는 힘의 논리로 돌아가는 곳. 협약, 협정, 조약 같은 것은 다 보기 좋으라고 만드는 종잇장에 불과하다.

“하지만 지금 하르크의 밀이 제국산으로 바뀌어 속여 팔고 밀 시장에 혼란을 주지 않습니까? 어떻게든 제재를 가해야지요.”

“세율을 올린다고 밀이 안 들어옵니까? 오히려 암시장을 통해 들어오는 양만 늘고, 시장의 혼란만 더 가중시킬 겁니다. 역효과가 더 크다는 말씀입니다.”

레이먼드의 말에 드미트리 후작이 수염을 정리하며 말했다.

“그래서 국경의 경비를 더 철저히 하고 처벌 수위를 높이자는 이야기가 나온 것이네. 드미트리 경.”

가만히 말을 듣고 있던 카르넌이 입을 열었다.

“국경을 강화하면 하르크에선 그를 정치적이고 무력적인 압박으로 느낄 수 있습니다. 하르크와의 관계 개선을 통해 하르크 내부에서 해결을 좀 더 독려하는 것이…….”

그 말을 듣고 있던 도로테아는 입술이 움찔거렸다.
그깟 하르크 조금 압박하면 어때서?
하르크의 눈치를 보게 된 건 다 선대 황제 때 하르크와의 국지적인 전투에서 패배하고 협상으로 무마한 역사가 있기 때문이다.
그러니까 군사력을 키워야지. 나라를 평화로만 다스릴 수 있다고 생각하는 건가?
그렇게 생각하던 도로테아는 숨을 천천히 내쉬며 생각을 잔잔하게 가라앉혔다.

‘그래, 전쟁이나 외교적 긴장감은 나쁜 거니까…….’

그때 레이먼드가 다시 입을 열었다.

“하지만 그 정도로 하르크가 제국을 공격해 오진 않을 겁니다. 그리고 우리는 그를 대비하며 병력과 군사력을 보강하면 되고요. 다른 국가들과 더 우호 관계를 맺는 법도 있습니다.”

마치 도로테아의 가려운 곳을 긁어주듯 한마디 하는 레이먼드.

‘꽤 잘 말하잖아?’

싸움을 썩 좋아하지 않는 편이라 하르크에게 넙죽 엎드리면 어쩌나 했는데.
그의 말대로 밀 관세 특혜를 없애고 다른 나라와 동등하게 부과했다고 해서 전쟁을 벌인다면 명분 없는 건 하르크 쪽이다.
국제적으로 다른 국가들과 연합하기에도 제국이 더 유리한 상황이고…….

‘게다가 전쟁이 벌어진다고 해도 충분히 이길 수 있어.’

예전에 한 번 작게 진 적 있는 걸로 잔뜩 겁먹어서는.
이는 인간이 벌에 한 번 쏘였다고 벌 한 마리를 무서워하는 것과 같다.
물론 쏘이면 아프겠지만, 벌과 싸우면 인간이 벌을 죽이는 게 훨씬 더 쉽지 않은가?
그런데도 예전에 한 번 쏘인 걸로 벌 한 마리에 미리 뒤꽁무니 빼는 격이니.

“하지만 폐하, 제국에서는 저렴한 하르크산 밀을 널리 사용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그에 세금을 더 늘리면 민생에 부담이 갑니다!”

“맞습니다, 폐하. 이는 백성들을 더욱 힘들게 할 뿐입니다.”

신하들이 모두 입을 모아 말했다.

하지만 도로테아는, 그리고 레이먼드는 이 말을 기다리고 있었다.

“그것은 걱정하지 않아도 됩니다.”

“예?”

“제국 내의 생산량을 증대시킬 생각입니다.”

“예? 그럼 숲이라도 베어 밀밭을 늘리시겠다는 겁니까?”

“아니요. 윤작을 통해 현 밀밭 면적에서 식량 생산량을 증대할 겁니다.”

“윤작이요?”

“준비해 드린 자료를 보시죠.”

레이먼드는 각자의 앞에 놓인 서류를 가리켰다.
그 안에는 밀, 순무, 클로버, 보리 그리고 콩 등을 섞어 경작하는 윤작법이 적혀 있었다.

“이 방식을 통해 동일 면적의 땅에서 평균 두 배의 식량 생산량 증대를 꾀할 수 있을 것으로 기대합니다.”

레이먼드의 말에 도로테아가 조용히 웃었다.
아무것도 아닌 것처럼 보일지 몰라도, 레이먼드가 해낸 건 어마어마한 것이었다.
그것도 길게는 2~3년이라는 긴 기간에 걸쳐 이뤄지는 농업과 관련된 일을 이렇게 몇 달 만에 결과를 내놓을 수 있다니.
도로테아까지도 깜짝 놀라게 한 결과물.

레이먼드의 말로는 국내외 지역의 윤작법을 모두 긁어모아 연구해서 도출해 낸 결과라고 했다.
특히나 레이먼드는 직접 밭을 일구고 농사를 지어봤기 때문에 연구의 원리와 실현 가능성을 이해하고 결정할 수 있었다.
예상대로만 된다면 이는 가히 ‘농업 혁명’이라고 불릴 수 있을 정도로 큰 성과를 낼 것이다.

“물론 토지의 성질과 기후에 따라 결과에 차이는 있을 수 있겠지만, 이 작물을 생산할 수 있는 지역에 이 농법을 보급할 것입니다. 특히 사료용 작물을 함께 기를 수 있으므로, 가축을 풀어 두던 목초지까지 밭으로 바꿀 수 있습니다.”

신식 농법을 설명하는 레이먼드의 표정은 무척 열정적이었다.

“하지만 이는 아직 시범 시행조차 해본 적 없는 계획일 뿐이잖습니까, 황태자 전하.”

“맞습니다. 무릇 일은 직접 해보면 변수도 많지 않습니까? 그런데 겨우 그것만 믿고 어떻게 하르크와 척을 지겠습니까!”

“당장 생산량이 증대되지 않으면 결과가 나오기까지 몇 년간 백성들은 또 배를 곯아야 합니다, 전하! 민생을 살피셔야지요. 지금도 다들 가난하여 굶어 죽고 아우성을 칩니다.”

그에 레이먼드가 도로테아와 눈을 맞췄다.
귀족들의 반대는 이미 예상한 일.

“그럼 이 신식 농법으로 3년 이내에 수확이 두 배 이상 나오면 경들은 하르크의 통관세를 올리는 데 찬성하며, 또한 경들이 그토록 걱정하는 ‘민생’을 위해 각 지역의 세금을 더 늘리지 않겠다 약속하겠습니까?”

레이먼드는 도로테아와 짜둔 대로 그들의 반박에 대처했다.
그러자 귀족들의 표정이 난감하게 굳었다.

“예?”

“같은 토지에서 나는 소출에 대해서는 정해진 만큼의 양만 세금으로 거둬야지요. 굶어 죽고 아우성치는 백성들이 먼저니까요.”

“하지만…….”

“윤작법만 고르게 퍼지면 후에는 제국의 밀을 역으로 하르크에 수출할 수도 있을 겁니다.”

어차피 하르크에 관한 일에 반대가 극심할 거란 건 알고 있었다.
특히 도로테아는 회귀 전 이 법안이 통과되지 않는 것을 본 사람이었다.
그러므로 도로테아는 레이먼드와 함께 회의를 준비하면서 귀족들의 반대를 예상하고 미리 전략을 짜두었다.
하르크의 통관세를 올리는 건 당장 급한 일이 아니다. 장기적으로 봤을 때 이를 어떻게 이용하느냐의 문제.
그때 마침 레이먼드가 신식 윤작법을 알아냈고, 도로테아는 그를 무기로 쓸 수 있도록 날카롭게 갈아주었다.

“바라한과 몇몇 시범지역에서는 이번 겨울부터 이 농법을 적용했습니다. 일전의 밀 농사와 연결된 것이니 이미 1년 차를 채워간다고 볼 수 있겠죠. 아마 내후년엔 정확한 결과가 나올 겁니다.”

레이먼드는 대신들에게 말했다.
그러자 가장 높은 자리에 앉아 있던 카르넌의 입가에 희미한 미소가 돌았다.

“신식 농법이 같은 면적에서 두 배의 식량을 내는 게 확인될 시 다른 절차를 모두 생략하고 하르크의 통관세를 올리고 국경을 강화하도록 하지.”

“하지만 폐하……!”

“그리하도록, 하지.”

카르넌이 반박하려는 드미트리에게 다시 한번 강조하여 말했다.
논리적으로 반박하려는 이는 더 나오지 않았고, 황제의 명에 따라 서기관은 해당 사항을 명확하게 기록해 두었다.
도로테아가 레이먼드와 눈을 마주쳤고, 레이먼드가 하얀 이를 드러내 보이며 웃었다.
그리고 테온은 뒤에서 침묵하며 두 사람을 지켜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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