폭군님은 착하게 살고 싶어 131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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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무것도 모를 땐 정령이 좋은 걸 거라고만 생각했는데 말이야.”

테온이 무거운 기운을 털어내고 가볍게 툭 말했다.
어린 시절엔 정령사가 되는 꿈을 꾸기도 하고, 선대 프리드들이 다뤘던 정령 이야기에 경이감을 느끼기도 했다.
그러자 레이먼드는 테온의 말에 동의한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맞아. 처음 각성했을 때나 신기하고 좋았지.”

레이먼드가 자조했다.
테온처럼 정령을 통제하기 어렵다든가 위험한 것은 아니지만, 정령이 좋기만 한 건 아니라는 걸 그도 잘 알고 있었다.
겨우 반딧불이들을 불러내게 된 순간 레이먼드의 삶은 순식간에 바뀌었다.
황태자 수업을 받을 때 얼마나 정령이 싫던지, 이럴 줄 알았으면 차라리 각성한 걸 숨길 걸 그랬다고 생각한 적도 많았다.

‘……어쩌면 도로테아는 똑똑하니까 각성한 걸 지금까지 숨긴 게 아닐까?’

정령 하나에 딸려오는 수많은 의무와 책임이 싫어서.
늦은 나이에 갑자기 정령의 힘을 각성했다는 건 불가능한 일.
열 길 물속은 알아도 한 길 도로테아 머릿속은 알 수가 없으니, 몇 수나 앞을 내다보는 똑똑한 도로테아는 정령을 계획적으로 숨긴 것일지도 몰랐다.

“그러고 보면 네레우스가 참 대단해. 그 녀석은 체질부터 타고난 정령사야. 정령 못 다뤘으면 어쩔 뻔했어?”

레이먼드가 무거운 주제를 털어내며 웃었다.
물의 정령을 다룰 수 있다는 것 하나에 으스대는 네레우스가 가끔은 부럽기도 했다.
네레우스는 종종 정령의 힘으로 ‘격’의 차이를 보여주며 사람을 위협하거나 내리누르기도 했는데, 레이먼드와 테온으로서는 상상도 할 수 없는 일이었다.

특별한 힘인 정령으로 다른 무력한 사람을 위협하다니, 비겁하고 야비하게 느껴질 법도 한데.
게다가 레이먼드는 애초에 싸우는 걸 싫어했고, 테온은 정령을 꺼냈다간 사건이 가볍게 끝나지 않을 것을 두려워했다.

“그래도 너와 내 정령이 딱 하나 잘한 게 있지. 너는 이제 평생 내 친구가 되어줄 수밖에 없다는 거. 내가 아무리 싫어져도 넌 날 벗어나지 못한다고?”

레이먼드가 짐짓 테온을 협박하듯 쿡쿡 찌르며 눈을 가늘게 떴다.

“게다가 정령 덕에 세계 최고의 보좌관을 얻게 될 것 같은, 멋진 예감이 드는데!”

레이먼드가 테온의 목을 팔로 감으며 장난을 치자 테온이 결국 웃음을 터뜨렸다.

“정령이 아니었어도 난 네 편, 네 친구였을 거야, 레이먼드.”

* * *
집에 돌아온 테온은 작은 상자에 담아두었던 손수건과 유리병을 꺼냈다.
낡은 손수건엔 채 빠지지 않은 옅은 블루베리 물이 얼룩덜룩하게 묻어 있었다.

‘네 물건이니까 버리더라도 네가 버려줬으면 좋겠어.’

프리디아에서 이것들을 돌려받은 후 그는 상자에 손수건과 병을 보관해 왔다.
왜 그랬는지 모르지만, 그는 도로테아가 돌려준 이 물건들이 소중하게 느껴져서 차마 버릴 수가 없었다.

사실 그는 이 물건에 어떤 추억이 담겨 있는지 전혀 알지 못했다.
도로테아가 무슨 생각으로 손수건을 가지고 있었고, 버려도 그만인 연고 병을 왜 지금까지 보관하다가 뒤늦게 그에게 돌려준 건지.

그녀가 이 손수건으로 뭘 했고, 연고가 그녀의 상처에 얼마나 도움이 됐는지.
하지만 그가 알지 못하는 도로테아의 이야기가 담긴 물건을 가지고 있는 것만으로도, 그는 도로테아와 꽤 가까워진 기분이 되곤 했다.
하지만 이제는 이 낡은 물건, 빛바랜 추억과 이별할 때가 왔다.

그는 잠시 손수건을 들고 고민하다가 그를 꽉 쥐고 한쪽에 있던 벽난로로 다가갔다.
테온은 그 앞에 서서 한참 동안 불을 응시했다.
어둠을 몰아내는 밝은 빛과, 공기의 작은 파동에도 흔들리는 뜨거움을.
그리고 손수건을 움켜쥔 채 차마 펼 수 없는 주먹을.
* * *
도로테아의 고민은 ‘어떻게 에단을 자연스럽게 자주 만나느냐’였다.

가장 좋은 건 에단을 그녀가 있는 황궁에 정기적으로 들어올 수 있게 자리를 만드는 것이었다.
어차피 에단은 능력이 있으니 황궁에 불러들여도 의심을 사진 않을 것이다.
다만 그의 어떤 구실로 불러들이느냐가 문제인데…….

“황녀님, 요즘 기분이 좋아 보이시네요?”

그때, 커튼을 걷으러 들어온 클라라가 도로테아를 보고 물었다.

“내가?”

방금까지 심각하게 고민하고 있었는데, 좋아 보였다고?

“네, 보기 좋아요.”

클라라가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싱글싱글 즐거운 얼굴로 생각에 잠겨 있다가 쓰지 않던 서신을 쓰고 콧노래를 부르다가 다시 거울을 보고 빙그레 웃고.
지금까지 본 도로테아의 모습 중 가장 생기 넘쳐 보여서, 클라라는 흐뭇했다.

“저…… 클라라. 나 악기 배워볼까?”

도로테아가 슬쩍 물었다.

“악기요?”

“연주회 다녀왔는데 나만 다룰 줄 아는 악기가 없는 것 같아서…….”

……는 핑계. 에단을 불러들이고 싶어서였다.
물론 에단이 피아노를 치고 바이올린을 연주할 때마다 악기 연주에 관심이 생긴 것도 사실은 사실이었다.

“좋은 생각이에요, 황녀님! 황녀님께서 다양한 것에 관심을 가지시니 저는 기뻐요.”

악기를 배우는 것은 있는 자들의 여유 있는 취미의 상징과 같았고, 귀족들은 어릴 때부터 학기 하나쯤은 배우곤 했다.

“에단 도련님이 피아노랑 바이올린은 그렇게 잘하신다면서요!”

클라라가 먼저 에단의 이름을 꺼내자 도로테아가 펜을 쥐고 있던 손을 움찔했다.

“에, 에단을?”

도로테아는 전혀 생각하지 못한 척 시치미를 뗐다.

‘……너무 티 나지?’

애초에 클라라에게 모르는 척하는 게 의미가 있나?

이미 에단과 도로테아 사이에 묘한 기류를 알고 있는데.
아니나 다를까 클라라는 두 사람의 관계를 거들 작정인지 적극적으로 도로테아를 지원했다.

“에단 도련님이 요즘 사교계를 싹 쓸어버리셨다고 소문이 자자한데요. 들었는데 어디서 고액의 후원 제의도 받으셨대요.”

“그래……? 에단을 레슨 선생님으로 부르기 이상하진 않을까?”

“그럼요. 지금까지 에단 도련님께 레슨을 부탁한 사람이 몇 수레는 될걸요? 문제는 에단 도련님이 전부 거절하셨다는 거지만요.”

클라라는 도로테아보다 소문에 밝았다.
황궁에서 일하는 사람들은 사교계의 소문에 밝아야만 살아남을 수 있다던가.
아무튼 클라라의 덕분에 도로테아는 조금 용기가 생겼다.

“그럼 에단에게 부탁해 볼까?”

“좋죠, 아마 도련님도 황녀님 부탁이라면 들어주실 거예요.”

클라라가 격하게 고개를 끄덕이며 엄지를 추켜세워 보였다.
* * *
에단은 집사에게서 황실의 직인이 찍힌 편지를 받자마자 올라가는 입꼬리를 감출 수가 없었다.
봉투에 쓰인 ‘도로테아 밀라네어’라는 귀한 이름 때문이었다.
연서일 리는 없다. 황실의 직인이 찍힌 공적인 서신에 비밀 연애를 털어놓을 수는 없을 테니.

하지만 그럼에도 에단은 이 편지가 감동적일 정도로 소중했다.
도로테아는 아마 모를 것이다. 이것이 그녀가 그에게 보낸 최초의 편지라는 것을.
에단은 손때 하나 묻어선 안 되는 귀중한 보물을 다루듯 편지를 소중히 든 채 기도를 올리는 경건한 사제처럼 한참을 그 자리에 서 있었다.

그는 책상을 손수건으로 꼼꼼히 닦아내고 편지를 그 위에 조심스레 올려놓았다.
도로테아의 손길이 담긴 하얀 봉투에 작은 티끌 하나조차 용납할 수 없었다.
어떻게 하면 황실의 씰을 훼손 없이 떼어 낼까 골몰하던 그는 서랍에 있던 가장 좋은 페이퍼 나이프를 꺼냈다.

그리고 고대 유물을 발굴하는 섬세한 학자처럼 조심스레 씰을 떼어 냈다.
그는 손상 없이 떼어 낸 봉투 안의 편지를 조심스레 꺼냈다.
편지지로 쓰기엔 지나치게 고급스럽고 도톰한 재질의 종이엔, 금박을 입힌 덩굴무늬 테두리가 둘려 있었다.

그에 에단은 손으로 눈을 가리며 벅찬 가슴을 진정시켰다.

모르는 사람이 보면, 황실에서 온 편지이니 그럴 수 있겠다 하겠지만, 황제 도로테아 밀라네어 곁에서 일해 본 그는 알았다.
도로테아는 편지지의 재질을 그다지 신경을 쓰지 않는 사람이라는 걸.
그런 그녀가 보낸 편지지가 이렇게 고급스럽다는 건 일부러 신경 써서 편지지를 고르고 구했다는 뜻.

대체 얼마나 더 사랑스러워질 생각인지.
그는 심호흡을 한 번 하고 지나치게 예쁜 편지지의 내용을 읽어보았다.
공적인 경로로 보내온 편지이기에 내용은 사무적이었다.

[지난 클럽 연주회에서 에단 브론테 님의 연주를 감명 깊게 들었습니다.]

‘에단 브론테 님이라니…….’ 그는 딱딱한 호칭으로 그를 부르는 도로테아의 글자가 즐겁기만 했다.

[나의 레슨을 맡아줄 교사를 구하고 있습니다. 에단 브론테 님이 이에 적합하다 생각되어 서신 보냅니다.]

공고문에나 있을 법한 문장이 보고 싶다는 말로 읽히는 것은 자의식 과잉일까?
도로테아는 평소엔 제대로 읽지 않고 넘겼을 상투적인 문장조차 천천히 곱씹을 만한 아름다운 시구로 변모시켰다.
에단은 마치 두꺼운 연구서를 읽는 듯 몇 장 되지도 않는 편지를 오랫동안 읽었다.

* * *
당연히 에단의 답신은 긍정이었다.
도로테아는 지체 없이 그를 황궁으로 초청했다.
에단은 그가 가장 아끼는 옷을 골라 입고 황궁으로 향했다.
그는 도로테아가 있을 레나스코르 궁으로 걸음을 옮기며 들뜬 마음을 진정시켰다.
오늘따라 하늘은 새파랗고, 햇살은 청명하게 내리쬐고, 아름다운 새가 지저귀고, 바람이 적당히 선선하게 느껴졌다.

세상이 이렇게 아름다웠나!
삶을 두 번이나 살았지만, 그는 세상이 이렇게 아름답다고 느낀 일이 거의 없었다. 날 때부터 세상은 그에게 아름답게 굴지 않았으니까.
하지만 지금의 기분이라면 양옆에서 조나단과 네레우스가 꼴 보기 싫은 엉덩이춤을 춘대도 웃으며 독려의 박수를 쳐 줄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리고 레나스코르 궁에 도착했을 때, 그는 궁 주변을 돌아보던 조이와 마주쳤다.

“에단 브론테.”

그를 보는 조이의 눈빛이 날카로웠지만, 에단은 그녀의 눈빛이 그다지 기분 나쁘지 않았다.
조이는 그에게 절도 있는 걸음걸이로 다가오더니 앞을 가로막듯 궁전을 지키고 섰다.

“나는 당신이 황녀님한테 얼쩡거리는 게 싫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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