폭군님은 착하게 살고 싶어 129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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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이올린이 그게 뭐지, 에단 브론테?”

네레우스가 한쪽 눈썹을 추켜세우며 물었다.
에단은 그에 싱긋 웃으면서도 사람들을 향해 고개를 숙였다.

“기다려 주신 모든 분께 죄송하다는 말씀드립니다. 보시다시피 제 부주의로 당장 약속드린 곡을 선보일 수가 없을 것 같습니다.”

도로테아는 너덜너덜하게 현이 끊어진 그의 바이올린을 보았다.
지금까지 에단의 바이올린은 많이 보아왔지만, 저런 모습은 처음이었다.
특유의 섬세함을 지닌 에단은 악기 관리에도 신경을 많이 쓰는 편이었기 때문이다.
게다가 연주회 시작도 전에 현이 저렇게 다 끊어질 수가 있나?
바이올린으로 어디 날카로운 곳을 긁거나 세게 친 것이 아니고서야, 저럴 리가 없는데.

“교체용 현을 여분으로 가지고 다니지도 않나?”

네레우스가 묻자 에단이 고개를 저었다.

“늘 두 개씩은 꼭 케이스에 같이 넣어서 다닙니다만, 오늘은 이상하게도 그마저 다 사라지고 여기 G현 하나만 남아 있더군요.”

“악기 관리가 그렇게 소홀하다니. 연주자로서 실격이 아닌가?”

비아냥거리는 네레우스의 말에 에단이 고개를 끄덕였다.

“맞습니다. 제 실수죠.”

누가 더러운 짓을 할 걸 예상했어야 하는데.
에단은 네레우스를 응시하며 말을 이었다.

“다른 연주자분들께 양해를 구하며 현을 구하고 있으니 양해 부탁드립니다. 대신 제 불찰에 용서를 구하는 의미로 기다리시는 동안 다른 곡을 연주할까 하는데, 괜찮을까요?”

“지금 그 바이올린으로 연주하겠다고? 현이 하나밖에 없는 상태로?”

“줄 하나로도 여러 소리를 낼 수 있는 게 현악기의 매력 아닐까요, 네레우스 왕자님?”

에단은 그러더니 사람들에게 허락을 구하듯 눈을 돌렸다.
그러자 사람들이 박수로 그의 연주를 격려했다.
청중의 환영에 에단은 정중히 인사를 올리고 바이올린 현을 정리하여 어깨와 턱 사이에 끼웠다.
그리고 가느다란 한줄기 현 위에 활을 올려놓고 소리를 공중으로 부드럽게 밀어냈다.

그러자 정말 현 하나에서 음이 바뀌며 부드러운 선율을 빚어나갔다.
현 하나에 집중된 소리는 선명하면서도 고운 음색으로 퍼졌다.
손가락의 위치가 조금만 달라져도 음정이 반음, 혹은 반의 반음이 틀어지곤 하는데 그의 손가락은 음정 하나하나를 또렷하게 짚어냈다.

느리게 시작했다가 경쾌하게 빨라지는 가운데서도 그는 미소를 잃지 않으며 여유롭게 곡을 소화해 냈다.
사람들은 현 하나로 능숙하게 뽑아내는 에단의 곡에 귀를 기울였다.
네레우스는 에단이 단순히 취미 삼아 혹은 멋을 부리기 위해 바이올린을 한 뜨내기가 아니라는 것을 깨달았다.

어딘가의 왕립 오케스트라에 초대를 받은 게 이상하지 않을 정도로 훌륭한 실력. 음악을 사랑하는 던컨 백작 부인이 아낄 만한 재능.

음악에 대해서는 잘 알지 못하는 도로테아도 가느다란 줄 하나로 소리를 가지고 노는 에단이 신기하기만 했다.
그가 연주를 완벽하게 마치자 사람들은 흥분된 박수를 보냈다.

“이 곡은 대체 뭐죠?”

“나는 평생 이런 연주를 들어본 적이 없어!”

연주 자체의 완성도만이 아니라 현 하나로 연주한다는 독특한 면이 사람들의 관심을 끈 것이다.
하지만 네레우스는 그가 연주한 곡을 이미 알고 있었다.

“솔가니니의 ‘메소 환상곡’이군.”

“맞아요. 참 재밌는 곡이죠. 바이올린의 매력을 느낄 수 있는 곡이기도 하고.”

네레우스가 정답을 맞히자 에단이 바이올린을 내려놓으며 웃었다.
메소 환상곡은 세기의 비르투오소로 알려진 솔가니니가 어느 오페라 곡의 주제를 변주한 곡이었다.
현 하나로 보여줄 수 있는 온갖 기교를 담은 곡.
곡의 풍성함과는 별개로 기다리는 시간을 즐겁게 해줄 쇼로는 완벽한 연주였다.

“언제부터 바이올린을 배웠지?”

“태어나기 전부터…… 요?”

네레우스의 가시 돋친 질문에 에단이 농담처럼 대답했다.
네레우스의 표정이 썩기는 했지만 에단의 말은 거짓말이 아니었다.
회귀 전부터 그는 바이올린을 꽤 잘 다뤘기 때문이다.
피아노도 좋아했지만 휴대가 간편한 바이올린은 그의 빈 시간을 채워주는 벗이 되곤 했다.

사교계에 나갈 수도 없는 서자였던 그가 할 수 있는 건 부유한 공작 저에 있는 책과 악기로 시간을 보내는 것뿐이었으니까.
학교에 다니지도, 누굴 만나는 일도 거의 없으니 하루 여덟 시간 연습도 언제든 가능했었다.
하지만 딱히 연주자로 이름을 날리고 싶은 욕심도 없었을뿐더러, 공작 부부 또한 악기는 교양으로서 생각했을 뿐, 그를 연주자로 세간에 내보일 생각은 하지 않았기에 연주자를 꿈꿔본 적은 없었다.

게다가 ‘프로가 아닌 아마추어가 이 정도 수준이라니!’ 하는 칭찬이 더 재미있었으니까.
사교계 데뷔 후, 도로테아에게 빠진 뒤로는 바이올린 연주자라는 직업은 더 뒷전이 되었었다.
회귀 후, 공작가에 입성하자마자 그가 처음 잡은 것도 바이올린 활이었다.
복잡한 생각을 날리기 위해 시간이 날 때면 바이올린과 피아노를 연주했다.

연주에 맞는 몸을 만드는 게 좀 힘들긴 했지만 그에게 바이올린은 많지 않은 취미 중 하나였고 시간만 되면 네다섯 시간씩 바이올린을 잡고 있곤 했다.

‘단순히 햇수로만 따지면…… 30년이 훨씬 넘었잖아?’

회귀 전에 거의 20년, 회귀 후에 또 10년 훨씬 넘게 했으니.
그 가운데 바이올린 연습을 소홀히 한 기간이 있어도 30년은 긴 기간이다.
새삼 시간을 따져본 그는 갑자기 늙은 기분이 되었다.

“에단 브론테 님!”

그때 무대 아래에서 사용인이 그를 불렀다.
다행스럽게도 그가 연주하는 사이 교체할 현을 구한 모양이었다.

“그럼 곧 다음 곡을 준비할 테니 잠시만 기다려 주시기 바랍니다.”

에단은 청중에게 양해를 구하고 현을 갈기 위해 무대에서 내려갔다.
* * *
몇 분 뒤, 현을 새로 갈고 다시 올라온 에단은 능숙하게 예정되어 있던 다음 곡을 연주했다.
그는 연주하는 동안 몇 번이고 도로테아와 눈을 맞췄다.
아무도 모르게 서로 눈을 마주치면 미소가 저절로 번지려는 걸 참아야 했다.

다른 사람들이 보고 있으니까 표정 관리에 철저할 것.
그나마 다행인 건, 에단에 홀린 듯한 표정을 한 게 도로테아만이 아니었다는 점이다.
그 자리에 모인 여성들, 나아가 남성들까지도 그의 연주에 넋을 놓고 빠져들었다.
바이올린의 매혹적이고도 우아한 선율 속에서, 에단의 아름다움은 더욱 수려하게 빛났다.

바이올린 활을 켜는 그의 길고 매끈한 손가락, 춤을 추듯 부드럽게 흔들리는 찬란한 은발, 그리고 부드럽게 내리깐 그의 짙은 속눈썹. 선율 속에 젖어 든 깊은 눈동자.
그의 연주는 시각적으로도 청각적으로도, 완벽히 예술적이었다.
그의 연주가 끝나자 사람들은 모두 기립박수를 쳤다.

에단이 무대에서 내려가고도 박수는 수 분간 지속됐다.
몇몇은 아예 에단이 내려간 무대 뒤로 뛰어가 미리 준비해 온 꽃다발을 건네고 선물을 주기도 했다.

그 모습만 보면 에단은 마치 연주를 끝낸 것이 아니라, 세계적인 콩쿠르에서 수상한 것 같았다.
연주회는 성황리에 끝났고, 연주회 뒤에 마련된 작은 파티 자리에서도 에단의 인기는 식을 줄 몰랐다.

에단은 다른 이들에게 둘러싸여 있으면서도 눈으로는 도로테아를 좇았다.
도로테아는 에단에게 관심 없는 척 다른 이들과 이야기를 나누면서도 슬쩍 그와 눈을 맞추고는, 다시 도망치듯 시선을 돌렸다.
그 짧은 눈 맞춤은 아슬아슬하면서도 아찔했다.

‘비밀로 하면, 앞으로 황녀님과 만날 구실을 뭐로 만든다……?’

에단은 사람들의 관심 속에서도 도로테아에게로 온 신경이 쏠려 있었다.

“저…… 에단 님.”

에단이 생각에 잠겨 있는데 익숙한 목소리가 그를 불렀다.
시선을 돌리니 모니카 아포니타가 거기에 있었다.

“아, 모니카 님.”

에단은 표정을 차갑게 굳히며 그녀를 보았다. 더는 그녀에게 잘해 줄 필요가 없었기 때문이다.
게다가 도로테아에게 오해를 사고 싶지도 않고.

“오늘 연주 정말 훌륭했어요.”

모니카의 칭찬에 에단은 건성으로 고개를 한 번 끄덕였다.

“저 하르크로 돌아가려고요…….”

“아, 그렇군요. 조심히 돌아가시길.”

예정보다 빠른 귀국이었지만 에단은 딱히 그 이유를 묻지 않았다.
옹졸한 네레우스와 같이 람파스에 있는 게 불편하기 때문이겠거니, 추측할 뿐이었다.
모니카는 할 말이 있는 듯 입술을 우물거리다가 느리게 입을 열었다.

“……저와 비교할 수 없을 만큼 황녀님이 멋진 분이라서, 에단 님이 왜 좋아하시는지 이해할 수 있을 거 같아요.”

“예?”

“걱정하지 마세요……. 어디 이야기하고 다니지는 않으니까요. 그래도 혹시 나중에 하르크에 오실 일이 생기면 그땐 저희 가문에 한 번 들러주세요.”

에단은 모니카의 말에 머리를 굴렸다.
그러니까…… 정말 날 좋아하기라도 했단 뜻인가?
그때 하인 하나가 에단에게 다가왔다.

“네레우스 왕자님께서 잠깐 보자고 하십니다.”

네레우스의 이름에 모니카가 되레 움찔했다.

“미안하지만 다른 분들이 먼저 저를 찾아서 갈 수 없다고 전해 주시죠.”

에단이 단칼에 거절하자, 하인은 예상하지 못한 듯 당황했다.
바이올린 현도 끊어놓은 주제에 부르면 올 거라고 생각했나?

“에, 에단 님께 좋은 제안을 하시겠다고 하셨습니다.”

“그것참 좋은 제안이지만 정중히 거절하겠다고 전해 주시겠습니까?”

제안이 뭔지 듣지도 않았으면서 에단은 생긋 웃으며 거절했다.
그러자 모니카가 그를 조심스레 툭 쳤다.

“다녀오시는 게 좋을 것 같아요.”

모니카는 네레우스의 성격을 고려해 볼 때 순순히 그를 만나는 걸 추천했다.
이렇게 계속 거절했다가 일이 더 귀찮게 번질 수도 있다.
게다가 하인이 네레우스에게 에단이 모니카와 이야기를 나누느라 오지 않았다고 하면 일이 더 번거로워질 것이다.
결국 에단은 한숨을 쉬고 고개를 끄덕였다.
* * *

“훌륭한 연주야. 세간에 도는 게 헛소문은 아니었군.”

네레우스답지 않은 칭찬에 에단의 눈썹이 살짝 꿈틀거렸다.
그의 눈빛은 아까와 다르게 상당히 호의적이었다.

“이 실력으로 왜 오케스트라에 들어가거나 음악 클럽에 들어가 연주회를 열지 않은 거지?”

바이올린을 들고 음악을 좋아하는 귀족들을 찾아가 순회공연만 열어도 그는 엄청난 명성을 떨쳤을 것이다.
어마어마한 돈을 벌었을 테고, 누구나 부러워할 만한 풍족한 생활을 즐겼으리라.

“취미로만 즐길 생각이라서요.”

“거짓말하지 마. 이건 취미의 수준을 넘어섰어.”

“시간이 남아돈 덕분에 취미를 좀 열심히 즐겼죠.”

에단이 생긋 웃으며 말을 받아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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