폭군님은 착하게 살고 싶어 128화

Background color
Font
Font size
Line height

네레우스는 옆에 있던 작은 수선용 칼을 들어 E현을 끊어버렸다.
금속성을 띠었지만 가장 가느다란 E현은 그의 칼질 한 번에 쉽게 끊어졌다.
하나를 끊고 나니 다른 현을 끊는 것은 어렵지 않았다.
네레우스는 현이 끊어진 바이올린을 보며 픽 웃었다.

‘현 없이 잘 연주해 보시지.’

네레우스는 케이스 안쪽 주머니에 있던 예비 현까지 챙기고 케이스를 원래 상태로 닫아놓았다.
그리고 정원에 있는 연못에 교체용 예비 현을 전부 던져버렸다.
* * *

“황녀님, 에단 브론테 님. 밖에서 사람들이 두 분을 찾고 있어요.”

문밖을 지키던 조이가 문을 두드리는 소리에 도로테아와 에단은 퍼뜩 정신이 들었다.
도로테아는 도둑질이라도 한 것처럼 가슴이 콩닥콩닥 뛰었다.

“이야기가 끝나가니 조금만 더 기다리라고 전해.”

에단은 도로테아 대신 문 너머에 대답했다.

“혹시 무슨 문제라도 생기셨는지요?”

“아니, 아무 일도 없어, 조이!”

조이의 목소리는 에단이 도로테아에게 무슨 짓을 한 건 아닐까 걱정하는 듯 예리하게 날이 서 있었다.

“연주회 시작 시각이 지났어요.”

그제야 두 사람은 어느새 시간이 훌쩍 지났다는 걸 깨달았다.

“응! 우리 얘기 거의 끝났어.”

대충 둘러댄 도로테아는 에단과 눈을 마주쳤다. 눈을 맞춘 것만으로도 픽 웃음이 터졌다.

“시간이 이렇게 흐른 줄 몰랐어.”

도로테아가 웃자 에단은 그 모습을 감상했다. 그는 자신의 앞에서 웃음 짓는 도로테아의 모습이 꿈이 아닐까 생각했다.
너무 비현실적이어서 눈을 뜨면 사라지는 환상일까 봐 두려웠다.
그래서 그는 도로테아를 품에 안은 채 놓지 못했다. 이게 그 평생의 마지막 기회가 될까 봐.

“혹시…… 입술이 붓거나 하지는 않았지?”

도로테아는 자신의 입술을 봐달라는 듯 살짝 고개를 들어 보였다.
그러자 쪽, 에단이 그녀의 입술 위에 다시 가볍게 입을 맞췄다.

“에단……!”

“걱정하지 마세요. 예뻐요.”

그러더니 그는 다시 도로테아의 이마에 다시 입을 맞췄다.

“그만해, 에단. 우리 이제 가야 해.”

“그냥 우리 빼고 하라고 하죠.”

에단이 정말 진지한 표정으로 말했다.
연주회는 더 이상 중요하지 않았다.
그는 도로테아를 품에서 놓고 싶지 않았고, 그녀와 밤새 함께하고 싶었고, 하고 싶은 이야기도 많았다.

“하지만 에단, 네 연주를 들으러 온 사람들이 저기 바글바글해.”

도로테아는 멀리서 들려오는 소음을 가리켰다.
작은 취미 음악 클럽에서 여는 정기 연주회라고 보기 힘들 정도로 많은 사람이 모인 이유.

“나도 네 바이올린 연주, 듣고 싶어.”

도로테아의 말에 에단은 어쩔 수 없다는 듯이 그녀를 품에서 놓았다.
황녀님께서 원하신다면 그리해야지.
게다가 빨리 나가지 않으면 조이가 매섭게 눈을 뜨고 두 사람을 의심할 것이다.

“나가기 전에, 하나만 부탁드려도 될까요?”

에단은 도로테아를 품에서 놓고도 아직 손은 꽉 붙잡은 채 물었다.

그에 도로테아가 고개를 끄덕이며 말해 보라고 눈짓했다.

“제 볼 한 번만 세게 꼬집어 주시겠어요?”

지금 당신 손을 놓는 게 불안해서 미치겠으니까.
그 말에 도로테아가 웃고는 그에게 먼저 입을 맞췄다.
그러곤 살짝 아픈 감각이 들도록 짓궂게 그의 입술을 물었다.

“꿈 아니야.”

도로테아가 미소를 지으며 속삭이자 에단은 방금 그녀가 물었던 자신의 입술을 안으로 말아 감추었다.

“역시 꿈인가 봐요. 황녀님이 제게 먼저 입을 맞출 리 없어요.”

도로테아의 손을 잡은 에단의 손에 더 단단히 힘이 들어갔다.
꼬집어 달라고 했는데 입술을 물다니. 이건 그가 알던 도로테아 밀라네어가 아니다.
그러자 도로테아가 그의 손을 흔들며 웃었다.

“이렇게 손을 꽉 붙잡고 있는데 어떻게 꼬집겠어.”

그제야 에단은 자신이 도로테아의 두 손을 완전히 속박하고 있었음을 깨닫고 손을 놓아주었다.
도로테아는 그런 에단의 모습에 쿡쿡 웃었다.
그 모습에 에단도 걱정을 잊고 미소를 지어버렸다.

‘꿈이면 어때. 깨기 전까지 취하면 되지.’

어찌할 수 없는 미래의 불안으로 순간의 소중함을 잊기엔, 도로테아가 너무 사랑스러웠다.
두 사람은 서로의 생소한 모습이 낯설고 어렵다기보단 즐거웠다.
에단은 말없이 도로테아를 두 눈에 담았다.

“하고 싶은 말 있어?”

“황녀님.”

“왜?”

“사람들 앞에서는 우리, 비밀로 해요.”

에단이 그녀의 뺨을 부드럽게 어루만지며 말했다.
어렵사리 확인한 마음을 비밀로 하자니, 싫을 법도 하지만 도로테아는 그 이유를 안다.
도로테아는 최근에 정령을 각성해 주목받는 황녀였고 에단은 이제 막 회자되는 사교계의 뜨거운 감자였다.
에단이 어느 파티에 모습을 드러냈다더라, 누구와 데이트를 했다더라 하는 이야기가 귀족들 사이에 비밀 소식지를 타고 돌고 있었다.

도로테아 또한 대부분의 초대를 거절해서 그나마 말이 적었지, 그녀가 모습을 드러내지 않는 이유라든가, 테온과 만났던 일 같은 건 귀족들 사이에 이미 알려져 있었다.
게다가 데뷔탕트의 파트너를 했던 두 사람에 관계에 대해서도 이러쿵저러쿵 말이 많았다.
에단이 최근에 다른 여자들을 적극적으로 만나고 다니지 않았다면 아마 두 사람에 대한 가십이 꽤 퍼졌으리라.

그 둘이 붙으면 얼마나 불필요한 말이 많아질지 누구나 쉽게 예상할 수 있을 것이다.
근거 없는 지저분한 소문으로 그치면 다행이지, 직접적으로 위해를 가하려는 자들이 나타날지도 모른다.

도로테아와 에단은 사람들에게 시달리는 것에는 진절머리가 나 있었고, 귀족들의 입방아에 오르고 싶지 않았다.

“좋아, 에단. 당분간은 비밀로 하자.”

도로테아 또한 다른 사람들의 시선과 소문이 두 사람의 감정과 관계에 영향을 미치지 않길 바랐다.
지금까지 너무 복잡하게 얽혀 왔으니, 이제 조용하고 차분하게 서로의 감정을 들여다보고 싶었다.

“들키지 않으려면 얼른 돌아가야겠어요.”

둘이 같이 사라졌으니 말하기 좋아하는 이들은 벌써 저들끼리 소설 한 편을 지어냈으리라.

“그럼, 저는 먼저 가서 연주회를 준비할게요, 황녀님. 천천히 오세요.”

에단은 그녀에게서 시선을 떼지 않은 채 걸음을 옮겼다. 그리고 문을 열기 전, 다시 한번 그녀와 눈을 맞췄다.

“사랑해요, 황녀님.”

사랑받고 싶다던 도로테아를 향해 작게 속삭였다.
* * *
에단은 도로테아보다 조금 먼저 연주회가 열리는 홀로 돌아왔다.

“에단 님! 어딜 가셨다가 이제야 오신 겁니까!”

초조하게 그를 기다리고 있던 주최 쪽 사람이 그를 서둘러 무대 뒤로 데려갔다.

“일단 앞에 다른 곡 순서를 당겨두었으니까, 바로 준비하세요.”

그가 도착했을 땐 일정의 지연을 막기 위해 뒤에 있던 순서를 앞으로 당겨 연주회를 시작한 후였다.
에단의 순서는 바로 다음이었다.
에단은 커튼 뒤쪽에 두었던 그의 바이올린을 찾았다.
무대에 오르기 전, 마지막으로 점검하고 준비하기 위해 그는 서둘러 바이올린 케이스를 열었다.
그런데.

“……!”

케이스를 열어본 에단은 그대로 굳어 바이올린을 보았다.
그를 도우려고 다가온 사용인도 바이올린의 상태를 보고 깜짝 놀랐다.

“누가 이런 짓을!”

케이스에 있던 바이올린의 현이 자기 혼자 죄다 끊어질 리는 없으니, 누군가가 고의로 끊은 게 분명했다.
놀란 사용인이 그에게 사람을 불러 범인을 색출할까 물었지만 에단은 고개를 저었다.
어차피 지금 범인을 잡기는 힘들 것이다.
에단은 바이올린 현으로 괜히 일을 크게 벌여 시간을 낭비하고 싶지 않았다.

다행이라고 해야 할지 바이올린은 현이 끊어진 것 외엔 문제가 없었기 때문이다.
게다가 그는 범인을 잡느라 연주회를 길어지게 하고 싶지 않았다.
빨리 연주회를 끝나고 도로테아와 시간을 보내고 싶다면 모를까.
그는 침착하게 케이스에 늘 구비하고 있던 예비 현을 찾아 주머니 부분을 뒤적거렸다.

그런데 예비로 가지고 다니던 현마저도 모두 사라져 있었다.

‘참 치밀하고 정성스럽군…….’

에단은 입술을 꽉 물었다.
누군지 대충 짐작 가는 사람은 있지만 당장 범인으로 몰 증거도 없었고 다툴 만한 상황도 아니었다.

“혹시 여분 현이 더 있을까요?”

에단은 자기보다 더 놀라 초조해하는 사용인에게 물었다.

“여기서 따로 준비해 둔 건 없고 다른 연주자분들께 여쭤봐야 할 것 같습니다.”

“그럼 미안하지만 다른 분들께 양해를 구하고 빌려다 주시겠습니까?”

“예, 바로 구해 보겠습니다……!”

에단의 침착한 대처에 사용인 또한 고개를 끄덕이고는 서둘러 달려갔다.
에단은 혹시나 싶어 아쉬움에 케이스 안쪽을 더 뒤적여 보았다.
연주자가 바이올린을 제대로 관리하지 못하다니. 남 탓할 것도 없이, 바이올린을 두고 한눈을 판 그의 잘못이었다.
그때 그의 손끝에 케이스 주머니 깊은 곳에 남아 있던 현이 집혔다.

아마 안쪽 깊숙이 밀려 있어 범인이 미처 발견하지 못한 듯했다.
꺼내 보니 G현이었다.
에단은 하나 남은 현을 들고 잠시 고민을 하다가 뭔가 결심한 듯, 바이올린의 끊어진 G현을 새 현으로 교체하기 시작했다.
* * *
도로테아는 그녀를 위해 마련된 가장 앞자리에 앉아 에단의 순서가 오길 기다렸다.

‘나도 악기를 배울 걸 그랬나 봐.’

그랬으면 에단과 할 수 있는 이야기도 더 많아졌을 텐데.
앞의 연주가 끝나자 곧 네레우스가 무대 위에 올라왔다.
아까 도로테아의 정령으로 단단하던 자존심에 금이 갔을 텐데도 네레우스는 꽤 산뜻한 표정이었다.

“자, 다음은 여러분이 모두 기다리시던 특별 초청 공연입니다. 모두 에단 브론테를 향해 큰 박수 부탁드립니다.”

네레우스의 말에 박수와 환호성이 홀을 떠들썩하게 흔들었다.
관중들의 열렬한 환영 속에 에단이 무대 위로 모습을 드러냈다.
아직 연주를 시작하지도 않았는데, 그의 등장만으로도 마치 연주를 끝낸 듯 흥분된 반응이 쏟아졌다.
네레우스는 ‘역시나’하고 생각했다.

연주보다는 그의 외모를 좋아라 하는 거겠지.
그때 네레우스는 에단의 손에 들린 바이올린을 보고 미간을 구겼다.
그가 들고 올라온 것은 끊어진 현이 달랑달랑 매달려 있는 바이올린이었다.
어떻게 G현은 갈았는지 몰라도 다른 현은 죄다 아래로 늘어져 있었다.
청중도 그의 바이올린 상태를 보고는 웅성거리기 시작했다.


You are reading the story above: TeenFic.Ne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