폭군님은 착하게 살고 싶어 126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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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로테아는 그가 그녀의 능력을 시험해 보려는 것임을 알아차렸다.

“저를 구경거리로 삼으시려는 건가요?”

도로테아가 표정을 굳히며 되물었다.
네레우스는 지금까지 도로테아를 은근히 무시해 왔다.
특히 예전에 검술과 지식을 겨루는 시험에서 그녀에게 패한 적도 있었다.
정령의 힘은 도로테아 앞에서 꿀리지 않을 수 있었던 그의 유일한 능력이었다.
때문에 그는 도로테아의 정령의 힘을 인정할 수 없었던 모양이다.

“불쾌하셨다면 죄송합니다. 하지만 데뷔탕트에서 보았던 황녀님의 정령이 너무 놀라워서요. 다들 그렇지 않습니까?”

네레우스가 사람들을 둘러보며 묻자 사람들이 고개를 끄덕였다.
보통 사람들에게 정령이란 신비로운 마법과 같은 것이라 보고 싶어 하는 것은 당연한 일.

“분명 세리티안에서 황녀님을 뵈었을 땐 정령의 힘을 다루지 못하셨는데, 이렇게 갑자기 각성하신 것도 참 이례적이라 정령사인 저도 신기하더군요.”

네레우스는 합리적인 추측을 바탕으로 그녀를 의심하고 있었다.
도로테아의 각성은 기존에 학자들이 연구해 온 정령의 힘에 관한 학설을 거스르는 것이었다.
각성 시기도, 각성한 힘의 크기도.

‘의심하는 사람이 없는 게 이상하지.’

도로테아 또한 네레우스가 왜 이렇게 대놓고 그녀를 시험하려고 드는 건지 이해할 수 있었다.
네레우스의 의심대로, 그녀의 힘은 진짜 그녀 것이 아니니까.
아마 그뿐만 아니라 다른 사람들도 이러한 의심을 품고 있을 것이다.
다만 도로테아를 만날 기회도 많지 않을뿐더러, 황녀인 그녀에게 감히 캐물을 용기가 없을 뿐.
혹은 정령을 다뤄본 적 없는 일반인이기에 ‘내가 모르는 뭔가가 있나 보다’ 하고 넘어가고 만 것이다.

“황녀님께 정령을 불러내는 건 미소를 짓는 것보다 더 쉬운 일 아닙니까? 저도 이렇게, 정령을 불러 사람들 앞에 보여줄 수 있고요.”

네레우스의 손짓 한 번에 그의 주변에 푸른 빛을 띤 물의 정령들이 맴돌았다.
대놓고 들어오는 도발.
귀족들은 네레우스의 정령을 보며 감탄하더니 도로테아에게로 시선을 돌렸다.
하르크의 도발 앞에 우베라가 가만히 당하고만 있을 수는 없지 않냐는 듯한 기대.
그리고 네레우스의 의심에 어느 정도 동조하는 호기심.
상황은 네레우스에 응전하지 않으면 이상해지는 쪽으로 흘러가고 있었다.

“제가 정령을 굳이 드러내지 않으려는 이유는, 불을 밝히는 것 외엔 쓸 데가 없는 정령으로 사람의 가치를 결정짓게 하고 싶지 않아서예요.”

도로테아의 말에 네레우스의 미간이 구겨지고, 귀족들이 웅성거렸다.

“그 말씀은 황실의 권위를 부정하는 겁니까?”

“아니요. 황실의 권위가 고작 정령 하나로 결정되는 게 아니라고 말하고 싶은 겁니다, 네레우스 왕자.”

황실이 황실답기 위해선 정령이 아닌 진정한 권위가 있어야 한다.
만인의 삶의 무게를 짊어지고 책임질 수 있는 능력.

그것이야말로 황제의 자격을 결정하는 것이다.

“정령을 가지고 으스댄다고 통치자의 자격을 얻는 건 아니랍니다, 네레우스.”

회귀 전에도, 회귀 후에도 도로테아의 이 신념은 변함이 없었다.
레이먼드의 정령 앞에 흔들린 적도 있지만, 이제는 안다.
도로테아 밀라네어가 폭군이었던 이유는 정령을 보지 못해서가 아니라 황제로서 백성의 삶을 책임지지 못했기 때문이란 걸.
필요한 건 ‘착하게 살기’, 다른 말론 ‘바른 황제가 되기’.
도로테아가 네레우스와 눈을 맞추고 생긋 웃자, 네레우스가 이를 꽉 깨물었다.

“그래서 끝까지 회피하시는 겁니까?”

네레우스가 비뚜름하게 입꼬리를 올리며 묻자 도로테아가 고개를 저었다.

“그럴 리가요. 이렇게 많은 분의 기대를 실망시킬 순 없죠.”

통치자는 백성의 바람을 들어주는 것이 마땅하니.
도로테아는 허리를 살짝 숙여 그의 귓가에 속삭였다.

“두려워하지 말고, 두 눈 똑바로 뜨고 봐.”

네레우스의 귓가에 나직이 흘러드는 목소리.
그와 동시에 눈앞에서 터지는 폭죽처럼 강한 빛이 폭발하듯 사방으로 퍼져나갔다.
네레우스는 도로테아의 뒤에 거대한 공작새의 꼬리처럼 퍼지는 빛의 파동을 목도했다.
살롱을 가득 채운 빛은 그 자리에 있던 모든 이의 숨을 멎게 했고 좌중을 압도했다.

살롱을 가득 채우며 퍼져나갔던 빛은 순식간에 도로테아를 휘감았고, 그녀의 눈부신 백금발이 정령의 힘에 휘날리며 반짝거렸다.
네레우스는 강한 정령의 힘에 몸이 저릿했다.
인정하고 싶지 않지만 정령을 다루는 도로테아 밀라네어는 가슴을 벅차게 할 만큼 아름다웠다.

정령왕이든 신이든, 인간 이상의 존재가 있다면 그녀와 같은 모습을 하지 않을까 싶을 정도로.
그리고 그 압도적인 장관에, 정령에 대해서는 아는 게 없는 사람들도 도로테아의 힘이 네레우스보다 강하다는 것쯤은 알 수 있었다.

“굳이 정령에서까지 나보다 약하다는 걸 증명받고 싶었나, 네레우스?”

도로테아가 생긋 웃으며 물었다.
네레우스는 모욕감에 얼굴을 일그러뜨리지도 못한 채 굳어 있었다.
다른 이들도 경이로울 정도로 화려한 그녀의 힘에 말을 잇지 못했다.
그때 단출하게 울리는 하나의 박수 소리가 정적을 깼다.
도로테아가 고개를 돌리니 살롱 입구에 은발의 미남이 서 있었다.
도로테아는 순간 심장이 쿵 떨어졌다.
도로테아와 눈을 마주친 에단은 부드럽게 미소하며 말했다.

“과연 정령의 주인이시군요.”

한없이 다정한 그의 목소리.

그가 도로테아에게 찬사를 보낸 후에야 다른 이들도 그를 따라 박수갈채를 보냈다.
네레우스의 얼굴이 일그러진 것도, 한 박자 늦게였다.
하지만 도로테아는 많은 이들의 칭찬과 박수 속에서도 에단만을 응시하고 있었다.
쿵쿵, 그를 보자마자 가슴이 성난 것처럼 난동을 피웠다.

에단은 오늘 바이올린 연주를 위해 검은 연미복을 입고 있었고, 연주할 때마다 그러하듯 은빛의 머리카락은 검은 리본으로 단정하게 묶고 있었다.
평소보다 다소 가라앉은 분위기의 에단은 여전히 수려하고 아름다웠다.
그와 함께 헤프고 저렴한 도로테아의 감정은 더 또렷해졌다.

며칠 동안 복잡했던 감정들의 답이 나왔다.
그의 얼굴을 다시 보는 것만으로도 간단하게.
이게 얼마나 깊은 감정일지, 얼마나 오래갈지는 모르겠지만 분명한 건 지금 이 순간 그를 향해 뛰는 심장.
감정이 확실해지자 도로테아는 성큼성큼 그에게로 다가갔다.
그리고 그녀는 그의 앞에 멈춰 섰다.

“하고 싶은 말이 있어, 에단.”

* * *
도로테아는 사용인에게 부탁하여 사람들의 눈을 피할 수 있는 작은 방을 안내받았다.
그녀는 조이에게 누구도 방해하지 못하도록 문 앞을 지키게 하였다.
단둘만 남은 조용한 방 안.
도로테아는 문이 완전히 닫히고 나서야, 에단에게로 눈을 돌렸다.
그러자 에단은 가라앉아 있던 표정을 갈무리하며 생긋 웃었다.

“정령의 힘, 잘 쓰고 계셔서 다행이에요.”

아무렇지 않은 듯 건네는 말.
도로테아는 그의 눈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여전히 지독하게 아름다운 그는 도로테아의 눈을 피하지 않았다.
그래서 그녀의 감정은 더 또렷해지기만 했다.
그녀는 어떻게 운을 떼야 할지 몰라 망설이다가 겨우 첫 문장을 만들었다.

“에단, 나 요 며칠 네 이야기를 전해 들었어.”

시작으로 좋은 문장인지는 잘 모르겠지만 그녀는 계속해서 말했다.

최근 그녀는 하인들을 통해 에단에 대한 소식을 접하고 있었다.
레스토랑 카로에서의 일 이후 그를 따로 만난 적은 없었지만, 도로테아는 에단이 매일 무엇을 했는지 쉽게 알 수 있었다.
그의 행동 하나하나가 사람들의 관심 대상이었고, 그와 만난 이들은 자랑하듯 소문을 퍼뜨렸기 때문이다.

에단은 최근, 적극적으로 사교계의 귀족들을 만나고 다녔다.
회귀 전과 다를 바 없이 그를 향한 세간의 관심은 높았고, 그의 인기는 식을 줄을 몰랐다.
그는 모니카와의 데이트 이후에도 편지를 보내온 몇몇 영애와 시간을 보냈다.
오늘 네레우스가 모니카에게 에단을 두고 ‘난봉꾼’이라고 한 건 다 그 때문이었다.

그뿐만 아니라 에단은 그를 부르는 사교 행사나 귀족들과의 식사 자리에도 참석했다.
벌써 에단과 혼인을 하고 싶어 하는 영애들이 부모를 조르고, 부모는 배경이 찜찜하지만 준수한 에단을 두고 저울질을 하고 있다는 소식도 들려왔다.
어쩌면 그를 선점하고 싶어 하는 이들은 벌써 에단에게 구혼장을 보냈을지도 모르는 일이다.

‘회귀 전엔 왜 그걸 이상하게 생각하지 않았을까?’

이렇게 인기 많은 에단이 늦은 나이가 될 때까지 어느 여인과도 결혼하지 않았는데.
도로테아는 그냥 그가 여러 귀족을 가지고 노느라고, 혹은 여자들에게 관심이 없어서 그렇다고 생각했다.
모순적이지. 그가 진정 정치적 욕심이 있었다면 혼인으로 유명한 귀족과 손을 잡아 힘을 키웠을 텐데.

도로테아는 테온에 눈이 멀어 에단의 혼사를 별로 중요하게 생각하지 않았고, 딱히 관심을 두지도 않았던 것이다.
어쩌면 에단이 결혼하지 않는 편이 더 마음이 놓였던 것인지도 모른다.
그가 다른 가문과 결혼하기로 결정했다면 분명 권력 문제와 연결될 테고, 꽤 신경 써야 할 터였다.
도로테아는 그의 결혼을 굳이 부추기고 관심을 가져 피곤해지고 싶지 않았던 것이다.

‘나…… 정말 못됐었구나.’

늘 자신의 곁을 지켜주던 에단에게 그 정도의 관심도 주지 않았다니.
그랬으면서 이제 와 이 마음을 고백해도 될까?

“잘 지내고 있는 것 같더라……. 오늘도 그렇고. 네가 벌써 바이올린 독주회 자리를 가질 정도로 사람들과 친해졌는지 몰랐어.”

도로테아는 어색하게 웃었다.
그에 에단은 아무런 대답도 하지 못했다.

‘잘 지내는 것 같다고?’

에단은 속으로 쓰게 웃었다.
틀렸다. 못 지내서 이 모양 이 꼴이 된 것이다.
그가 사교계를 들쑤시고 다니는 이유는 도로테아에게서 벗어나려는 몸부림에 지나지 않았다.
그는 레스토랑 카로에서 도로테아와 함께 있는 테온을 보고 정말 마음을 접어야 할 때가 왔음을 실감했다.

‘나는…… 테온이 이번엔 꼭 살았으면 좋겠어.’

도로테아는 테온과 함께 그가 알지 못하는 시간을 채워나갈 것이다.
그에게는 조금도 허락되지 않는 아주 긴밀하고 뜨거운 시간까지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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