폭군님은 착하게 살고 싶어 125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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늦겠다던 클라라의 재촉과 달리 도로테아는 연주회의 시작보다 조금 일찍 살롱에 도착했다.
아침부터 일찍 준비했으니, 어쩌면 당연한 결과였다. 덕분에 살롱은 아직 한산했다.

‘에단이 미리 와 있을까?’

리허설이라도 해보려고 일찍 와 있지 않을까?
도로테아가 오늘 연주회에 참석한 이유는 오직 에단 때문이었다.
에단을 만나 그와의 관계와 감정을 명확하고 깔끔하게 정리하려고.
마차에서 내린 도로테아는 대문 앞에서 대기하고 있던 집사의 안내를 받아 정원 안으로 들어섰다.
혹시라도 에단이 있는지 살피며 고개를 두리번거리는데, 불운하게도 그녀가 가장 먼저 발견한 건 모니카 아포니타와 네레우스 폰스였다.

‘오늘…… 불길한걸.’

산뜻하게 출발해도 불안한데, 들어오자마자 눈에 들어온 게 저 두 사람이라니.
두 사람은 정원의 외지고 어두운 그늘에서 무언가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도로테아는 그들과 딱히 엮이고 싶지 않았으므로, 무시하고 건물 안으로 들어가려고 했다.
하지만.

“약혼을 뒤엎어 놓고 내가 참석하는 연주회에는 무슨 낯으로 참석했지, 모니카?”

싸늘하고 건방진 네레우스의 목소리가 그녀의 귀에 흘러들어왔다.
왜 이럴 때만 귀가 예민하게 움직이는지 모를 일.

“아, 네가 좋아하는 그 에단 브론테 때문인가?”

그리고 에단의 이름은 그녀의 걸음을 멈춰 세우고 말았다.
네레우스는 자신과 약혼을 무산시킨 모니카가 뻔뻔하게 연주회에 참석한 것을 못마땅해하고 있었다.

“그렇게 해놓고 나를 볼 용기가 있다니, 아주 가상해. 네 가문과 부모를 생각했다면 이러지는 못할 텐데?”

“저도 연주회 초대장을 받았어요. 이런 자리에 참석할 자격은 있다고요……!”

네레우스에게 반박하겠다고 나름 힘을 준 모니카의 목소리는 의도와 다르게 가느다랗게 떨렸다.
모니카는 최근 네레우스를 만나지 않으려고 그와 겹치는 자리를 최대한 피해 다녔다.
그러나 네레우스는 마치 모니카를 고립시키기라도 하려는 듯 그녀가 초대받은 모든 자리에 얼굴을 비췄다.

모니카는 그를 피하기 위해 대부분의 약속을 취소해야 했다.
그러다가 오늘, 에단의 연주를 너무 듣고 싶어 용기를 내어 온 것이었다.
모니카는 최대한 네레우스와 부딪치지 않으려 했지만, 한 공간에 있으니 그럴 수가 없었다.

“내가 오늘 연주회를 주최한 클럽에 속해 있다는 건 알고 있을 텐데. 그럼 초대장을 받아도 눈치껏 빠졌어야지. 그깟 난봉꾼 같은 놈 하나 때문에.”

“에단 브론테 님은 난봉꾼이 아니에요!”

“그럼 에단 브론테가 일편단심, 네 반려라도 된다는 말인가?”

네레우스가 모니카에게 비아냥거렸다.

그러자 모니카의 몸이 무거운 것에 눌린 듯 움츠러들었고, 멀리서 대화를 듣고 있던 도로테아도 입술을 꾹 다물었다.
모니카가 반박하지 못하고 기가 죽자, 네레우스는 한쪽 입꼬리를 씨익 올리며 말을 이었다.

“그놈 친모가 술집에서 몸 파는 여자였던 건 알아? 딱 제 어미 피를 물려받아 뭐 하나 건져보려고 여자들이나 만나고 다니는 거 아닌가?”

“말씀이 심하세요……! 에단 님은 그런 분이 아니라고요!”

“아니기는? 요즘 에단 브론테에 대한 소문이 얼마나 파다하게 퍼져 있는데.”

“그러는 네레우스 왕자님이야말로 늘 사람을 무시하고 또 저랑 약혼한다면서 파티나 사교 모임 같은 걸 핑계로 다른 여자들과 어울리고 다니셨잖아요!”

모니카는 용기를 낸 듯 주먹을 꼬옥 움켜쥐며 네레우스에게 반박했다.
그러자 네레우스의 눈이 싸늘하게 식었다.

“말 다 했어……?”

에단과 같은 취급을 당한 네레우스는 확 손을 들어 올렸다.
모니카는 그에 눈을 질끈 감았다.
그런데.

“그만하죠, 네레우스 왕자.”

단호한 목소리와 함께 네레우스의 손이 멈췄다.
모니카가 조심스레 실눈을 뜨자 그녀 앞에 금발의 미인이 네레우스의 손을 붙잡고 있었다.

“도, 도로테아 황녀님!”

“도로테아 황녀님.”

놀란 모니카와 달리 네레우스의 관자놀이는 짜증과 분노로 움찔거리고 있었다.

“귀한 분께서 오늘 연주회에 친히 참석해 주신 건 감사하지만, 지금은 황녀님께서 끼어드실 일이 아닙니다.”

“하르크 왕실에 존경할 만한 품위가 있길 바랍니다.”

도로테아는 네레우스의 눈을 피하지 않고 조곤조곤하게 한마디 했다.
그녀가 네레우스의 손목을 꽈악 쥐자 네레우스가 이를 꽉 깨물더니 그녀의 손을 거칠게 뿌리쳤다.
그러곤 도로테아 뒤에 움츠러든 모니카를 날카롭게 노려보고 연주회가 열리는 살롱 건물 안으로 들어가 버렸다.

‘힘도 없는 여인에게 손찌검이라니 부끄러운 줄 알아야지.’

네레우스는 지난번 에피스테메 졸업식에서도 에단에게 주먹을 날린 적이 있었다.
충동이 아니라 버릇이다. 나쁜 손버릇.

‘회귀 전이나 후나 참 일관되게 마음에 안 드네…….’

레이먼드, 테온, 에단, 슈테판 등 다른 사람들은 회귀 후 못 보던 면이 보였는데 네레우스는 참 지조 있는 성질머리다.

“……감사합니다, 황녀님.”

네레우스가 떠난 방향을 보며 속으로 혀를 차는데, 뒤에서 모니카가 고개를 숙이며 감사를 표했다.
그녀의 청아한 목소리는 어딘지 주눅이 든 것 같았다.

“감사하긴요.”

모니카가 좋아서 도와준 건 아니었다.
솔직히 레스토랑 카로에서 에단과 함께 있던 모습이 마음에 걸려 껄끄러웠다.
그날 에단과 모니카가 뭘 했는지 도로테아로서는 알 길이 없었기에 오만가지 상상이 그녀의 머릿속을 괴롭혔다.
모니카와 하하 호호 웃으며 대화하는 에단, 모니카의 허리를 감싸 안는 에단, 모니카의 스테이크를 썰어주는 에단, 모니카의 입가에 묻은 소스를 닦아주는 에단, 모니카에게 예쁘다고 칭찬해 주는 에단 등.
도로테아는 수없이 확장되는 상상을 멈추려 애쓰며 힘껏 미소를 지어 보였다.

“그날 에단과 식사는 잘하셨나요?”

아무렇지 않은 척 최대한 부드러운 목소리.
그러나 도로테아의 열정적인 가식에도 모니카의 미간이 살짝 구겨졌다.

“식사를 잘…… 했느냐고요?”

“카로의 음식이 입에 맞지 않던가요?”

모니카의 반응이 찜찜하여 도로테아가 되물었다.

그러고 보니 에단은 그날, 음식이 썩 입에 맞지 않는다고 했다. 어쩌면 메뉴 선정을 잘못했을지도 모르지.

“에단 님이 아무런 말씀도 하지 않으시던가요?”

“……무슨 말씀이요?”

도로테아가 되묻자 모니카가 다소 부루퉁하게 입을 다물었다가 고개를 저었다.

“에단 님이 말씀하지 않았다면, 제가 드릴 말씀은 아닌 것 같네요.”

모니카의 말에 도로테아는 눈을 끔뻑이며 고개를 갸웃했다.

“……오늘 에단 님이 오시면 꼭 말 걸어보세요, 황녀님. 제가 드릴 수 있는 말씀은 여기까지예요.”

모니카는 머뭇거리다가 아리송한 한마디를 덧붙였다.
그러고는 다시 한번 고마웠다며 꾸벅 인사를 하고는 살롱 안으로 사라졌다.
* * *

“어서 오십시오, 도로테아 밀라네어 황녀님!”

도로테아가 살롱에 들어가자 요란한 소리가 그녀를 맞이했다.
사람들의 시선이 집중된 건 한순간이었다.
살롱의 사용인들은 그녀를 발견하자마자 일제히 큰 소리로 인사하며 가장 중앙 자리로 안내했다.
황녀가 온다는 말에 만반의 준비를 한 모양이었다.
딱 보아도 특별석임을 알아볼 수 있을 만큼 커다란 의자는 다른 의자들보다 쿠션이 더 푹신하고 등받이도 높았다.
다소 부담스러운 의자는 가뜩이나 집중된 시선을 더 끌어모으기에 적합했다.

“도로테아 황녀님께서 참석하시다니?”

“무슨 바람이 드신 걸까요?”

어지간해서는 모습을 드러내는 일이 없던 도로테아의 등장에 분위기가 어수선해졌다.
살롱의 주최 측 사람들은 그녀가 왔다는 소식에 한달음에 달려와 그녀에게 인사를 건넸다.

“자리가 불편하진 않으십니까?”

“괜찮아요.”

“필요한 것 없으십니까?”

“없으니까 신경 쓰지 말아요.”

제발. 사람들이 다 쳐다본단 말이야.
그들의 과도한 관심과 환대는 황녀가 왔다고 여기저기 써 붙이며 팡파르를 울리는 격이었다.
그에 반해 오늘 주최 측에 속하는 네레우스는 정원에서의 일로 감정이 상한 것인지, 멀리서 그녀를 재듯 쳐다보고 있었다.

‘말을 걸어주지 않으면 나야 감사하지.’

도로테아가 그렇게 생각하는 사이, 그녀 주위로 귀족들이 몰려들어 그녀의 시야에서 네레우스를 가려버렸다.

“어머, 왜 이제야 오셨어요, 황녀님! 다들 황녀님을 얼마나 뵙고 싶어 했다고요!”

“저는 황녀님이 걸어오시는데 여신이 들어오는 줄 알았습니다. 과연 밀라네어의 후광이……!”

지나친 칭찬이 불편했지만, 도로테아는 적당히 웃으며 상대해 주었다.
도로테아는 예전에 비해 이런 분위기에도 많이 적응한 자신의 모습을 발견했다.

“오늘 오길 참 잘했네요. 요즘 사람들이 가장 보고 싶어 하는 두 분이 참석하시다니.”

“가장 보고 싶어 하는 두 분이요?”

“황녀님과 에단 브론테 님이요. 특히나 오늘은 에단 님의 바이올린 연주를 기대하는 사람이 많거든요. 혹시 황녀님께서도 에단 님의 연주를 기대하고 오신 건가요?”

에단의 이름에 도로테아는 괜히 가슴이 찔렸다.
에단의 연주를 듣고 싶어서는 아니지만, 에단 때문에 온 건 맞지…….

“이제 조금씩 이런 자리에도 나와보려고요.”

차마 속 보이는 대답을 할 수 없어서 도로테아는 본심을 숨기고 얼버무렸다.
그러자 사람들을 가르고 들어오는 거만한 네레우스의 목소리.

“그것참 다행이군요. 황녀님의 얼굴 한번 뵙고 싶어 하는 사람이 얼마나 많았는데요.”

도로테아가 사람들의 관심을 한 몸에 받는 게 아니꼬웠는지 그는 기어이 사람들을 헤치고 도로테아 앞으로 나섰다.

“저도 꼭 황녀님을 뵙고 싶었는데 말이죠.”

“저를 만나고 싶었다고요?”

뻔뻔한 그의 태도에 도로테아가 되물었다.

“하하, 황녀님과 저는 다른 사람들과 쉽게 얘기하지 못할 ‘정령사’가 아닙니까? 같은 정령사로서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눠보고 싶었거든요.”

똑똑히 들으라는 듯 강조되는 ‘정령사’라는 단어.
다른 이들과 격이 다름을 강조하며 잘난 체하는 것 같았지만, 도로테아는 어딘지 싸한 느낌이 들었다.
그리고 역시나.

“그런 의미에서 황녀님, 한번 저희에게 빛의 정령을 보여주시지 않겠습니까?”

네레우스의 눈이 차갑게 가늘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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