폭군님은 착하게 살고 싶어 122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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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로테아는 테온과 같이 마차에 올랐다.
마차의 흔들림 위에 앉아, 도로테아의 감정도 덜컹거리며 불편하게 흔들렸다.
에단과 헤어진 후, 그 흔들림은 더욱 심해진 것 같았다.
도로테아는 테온이 그녀에게 보여준 어둠의 정령을 떠올렸다.
* * *

“좋아해요, 황녀님.”

테온의 갑작스러운 고백에 도로테아는 숨 쉬는 것조차 멈추고 놀라 얼어붙었다.
테온은 그런 도로테아를 보며 말을 이었다.

“물론 정열적이고 뜨거운 사랑은 아닐지도 몰라요.”

좋아한다는 말은 다양한 감정을 뭉뚱그린 말일 테니까.
테온의 감정은 정열적인 붉은빛 보다는 신비로운 보랏빛에 가까웠다. 우정의 푸름과 사랑의 붉음, 그 사이 어딘가에 위치한 모호한 감정.
테온은 이를 어떻게 명명해야 할지 정확하게 알지 못했다. 에피스테메에서도 이 감정의 정의를 배운 적은 없었으니까.

분명한 것은 이것이 짙은 호감이라는 점이다.
처음엔 단순히 레이먼드의 동생으로서의 호감이었다. 절친한 친우의 예쁘고 귀여운 동생.
하지만 푸르기만 했던 그 청명한 빛에 점점 다른 빛깔이 스며들기 시작했다.
그를 보며 울음을 터뜨렸던 첫 만남. 그녀가 놓친 프리드의 손수건을 주웠던 밤. 아름답게 반짝이며 검을 휘두르던 모습. 카르넌과 싸운 뒤, 애써 눈물 감추던 그날. 프리디아에서 함께 낚시를 하다 스친 입술.

그리고 황홀한 빛으로 데뷔탕트를 물들이던, 도로테아.
한 방울씩 섞여 들어가던 붉은색은 점차 이름을 붙일 수 없는 신비로운 빛으로 변해갔다.
자꾸 마음이 쓰이는 사람. 손을 내밀고 싶은 사람. 사랑스러운 사람.
단순히 친구의 동생으로만 보기엔 짙어져 버린 감정.
푸르지도 붉지도 않아서 더 오묘하고 매혹적인 빛.

“모호하게 들리시겠지만, 황녀님을 좋아하는 건 맞아요.”

그의 고백은 솔직했고, 그래서 도로테아를 더욱 혼란스럽게 만들었다.
차라리 사랑한다고 날것의 거짓을 말하든가, 사랑하지 않는다고 선을 그으면 좋을 것을.
왜 답이 나오지도 않은 감정으로 상대방에게 질문을 던지는 걸까?
희망도 아니고 절망도 아닌 것을 선물하는 이유는 뭘까?

혼란스러워하는 도로테아를 물끄러미 응시하던 테온은 다시 입을 뗐다.

“제가 솔직하게 말씀드리는 이유는 오직 한 가지예요.”

테온 또한 자신의 고백이 도로테아와 그를 더 혼란스럽게 만들리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
하지만 명확하지도 못한 감정을 솔직하게 고백하는 이유는 단 하나.

“저는 황녀님의 힘이 필요해요.”

그의 깊은 비밀을 말하기 위해선, 솔직함이 필요했기 때문이다.
그는 오랫동안 감춰온 비밀을 그녀 앞에 숨김없이 드러냈다.
어둠의 정령은 밤처럼 밀려와 테이블 위를 밝히던 낭만적인 향초의 빛을 지우고, 하얀 접시 위에 내려앉은 햇살도 집어삼켰다.
마침내 도로테아는 그의 깊은 어둠을 마주했다.

눈을 뜨기 힘들 만큼 눈이 부신 빛의 정령들만큼이나, 어둠의 정령은 눈을 감기 두려울 정도로 어두웠다.
눈앞에 있던 테온의 형체는 칠흑에 잠겨 사라졌고, 도로테아는 깊은 어둠에 목소리마저 잡아먹힌 듯 그의 이름조차 부를 수 없었다.
별 하나, 달 하나 없이 캄캄한 밤. 손을 뻗어도 아무것도 없을 것 같은 광막한 어둠.

그래서 도로테아는 눈물이 날 것 같았다.
이 공포를, 테온은 혼자 견뎠을까? 내가 레이먼드를 죽였을 때, 너는 나를 죽이고 싶지 않았을까?
암흑에 멀어 아무것도 볼 수 없는 그녀의 눈은 눈물을 흘리는 것밖에 할 수 없었다.
빛의 정령으로 도와줘야 한다는 걸 아는데, 먼저 손을 건네주고 싶은데, 이 어둠이 사라지면 그녀의 추한 모습이 보일까 두려워서 그녀는 어둠에 몸을 파묻고 울었다.
그리고 테온이 어둠의 정령을 거두었을 때, 도로테아는 두 손에 고개를 파묻은 채 얼굴을 들지 못했다.

“황녀님……?”

테온은 어둠 속에 울고 있는 도로테아를 발견하고 놀라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는 그녀에게 다가와 그녀를 살폈다.
갑작스러운 어둠에 많이 놀란 것이라고 생각했기에 테온은 도로테아에게 한없이 미안해졌다.

“죄송해요, 황녀님. 정령이…….”

도로테아를 달래려는데, 그녀가 그의 소매를 꽉 붙잡았다.

“조금 더 일찍 말해주지 그랬어……. 조금만 일찍…….”

도로테아는 자신을 살피는 그의 손길에 입술을 꾹 깨물었다.
그러면 지난 생에서도 그런 일은 없었을 텐데. 왜 나한테는 말해주지 않았지? 난 네 약혼녀였는데…….
아마 회귀 전의 도로테아가 미덥지 못했기 때문이리라.
착하지 못해서, 신뢰할 만하지 못해서, 이기적이고 욕심이 많아서.

말하지 못한 이유가 있었음을 아는데도 그가 원망스러웠고, 동시에 미안했다.
* * *
그리고 테온은 회귀 전과 다름없이 혼인을 청했다. 이전과 다른 게 있다면 그가 그녀 앞에 솔직했다는 것.

그러니까 도로테아는 그의 제안을 받아들이기만 하면 된다.
정략결혼을 하면 어떤가. 어차피 결혼은 가문의 사업이라는데. 게다가 그의 감정도 보랏빛이었고, 그는 꽤 다정한 사람이다.

나쁜 것 없는 선택. 아니, 그에게 미안한 마음을 속죄할 수 있는 최고의, 착한 선택.
그러니 도로테아는 고민할 필요가 없었다.
착하게 살기 위해서, 테온의 삶을 위해서는 그와 약혼하는 게 ‘옳은’ 것이니까.
그런데.

‘미안해, 테온. 너무 갑작스러워서.’

도로테아는 그의 청혼에 대답하지 못하고 카로에서 식사를 마쳤다.
테온도 어둠의 정령 앞에서 눈물을 흘린 그녀를 더 재촉하지 않았다.
그렇게 두 사람은 어영부영 자리에서 일어나 마차에까지 올랐다.
도로테아와 테온을 실은 마차는 황궁으로 향하고 있었다.
그녀는 자신이 왜 망설이는지 스스로도 납득하지 못했다.
그렇게 원하던 테온과의 결혼이니 그냥 하면 되잖아. 대체 뭐가 어려운 거야?

“황녀님.”

그때, 테온이 할 말이 있다는 듯 그녀를 불렀다.
그의 깊고 붉은 눈동자가 도로테아의 마음을 더욱 무겁게 짓눌렀다.

“오늘 제가 한 말은 전부 진지하게 드린 말씀이에요.”

그는 흔들림 없는 눈으로 도로테아를 응시했다.
알아, 네 목숨이 달린 일이라는 거. 내가 해야만 한다는 거.

“그러니까 테온, 나는…….”

“그래서 저는 황녀님께서도 진지하게 생각해 주셨으면 좋겠어요. 황녀님께서 후회하지 않으시도록요.”

도로테아가 머뭇거리며 입술을 떼려는데 테온이 말했다.

“그게 무슨 말이야……?”

“결혼은…… 저를 위해 하는 게 아니잖아요.”

테온의 말에 도로테아는 마치 머리를 한 대 맞은 듯 정신이 들었다.

“저는 청혼을 한 거지 협박을 하려고 한 게 아니에요.”

테온은 갈등에 매몰된 도로테아를 향해 옅게 웃어 보였다.
그는 동정이나 연민, 속죄의 수단으로 결혼을 갈취하고 싶은 게 아니었다.
그가 도로테아 앞에 솔직했던 이유는, 도로테아 또한 그녀의 감정을 솔직하게 살펴보고 대답해 주길 바랐기 때문이다.
그만큼 그는 그녀와의 결혼에 진지했고, 진심이었다.

“혼인은 황녀님을 위한 일이기도 해요. 황녀님의 삶을 결정하는 일이기도 하고요. 그러니까, 거절하셔도 황녀님이 제게 소중한 사람이라는 건 변하지 않을 거예요.”

그제야 도로테아는 자신이 고민하는 방향이 잘못되었음을 깨달았다.
어쩌면 그녀는 ‘착함’이라는 단순한 단어에 갇혀 그녀가 겪었던 짓을 테온에게 고스란히 하고 있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사랑 없는 결혼. 원치도 않았던 알량한 동정.
도로테아는 자신을 괴롭히고 상처 주었던 일들을 그대로 테온에게 하고 있었다.

도로테아는 무릎 위에 놓은 손을 꽉 말아 쥐었다.

“하지만 어둠의 정령은……?”

그럼에도 넌 내가 필요할 거잖아.

“다른 방법이 있겠죠. 그리고…… 혼약은 하지 않더라도 황녀님께 도움을 청해도 되겠죠?”

테온이 부드럽게 미소 지었다.
하지만 도로테아는 그 미소가 되레 아렸다.
엇갈린 마음, 우리가 조금만 더 일찍 솔직해졌다면 뜨겁게 사랑할 수 있었을까?
도로테아의 표정이 어두워지자 테온이 물었다.

“에단 브론테가 마음에 걸리시는 거죠?”

테온은 똑똑한 사람이다.
도로테아의 대답이 바로 튀어나오지 못한 이유 정도는 유추할 수 있을 만큼.

“……그를 사랑하시나요?”

에단을 사랑하냐고……?
도로테아는 놀란 듯 테온을 보았다.
그녀는 지금까지 단 한 번도 에단과 사랑이라는 단어를 연결해 본 적이 없었다.
에단이 그녀에게 사랑한다고 했지만, 여전히 현실감 없이 붕 뜬 감정 같기만 했다.
회귀 전부터 지금까지 에단은 그녀에게 충직한 신하이자 친구 정도에 지나지 않았다.
그런 에단에게 ‘사랑’이라는 말을 붙이는 게 낯설었다.

“말씀드렸지만, 저는 황녀님께서 이 결혼을 진지하게 생각해 보셨으면 좋겠어요. 그래서…… 황녀님도 확실하게 감정을 확인해 보셨으면 해요.”

도로테아는 지금까지 자신의 감정을 회피하기만 했다. 자신의 감정은 늘 나쁘고 잘못되었다고 생각했으니까.
하얀 도화지에 내가 원하는 대로 색을 칠하려고 하면 늘 잘못된 색을 칠하게 되니까 차라리 무채색으로 사는 게 현명하다고 생각했다.
무언가 좋아하는 것도 두렵고, 싫어하는 것도 두려웠다.

기계처럼 ‘착하게 살아야지’라고 되뇌며 ‘착함’에 모든 것을 맞추려 했다.
하지만 정작 테온은 도로테아에게 집중하고 있었다. 착하게 사는 것 말고, 당신이 진짜 하고 싶은 것이 무엇이냐고.

‘내가 원하는 것……?’

내 욕망이자 욕심, 아니, 희망이자 바람. 그게 뭐지?
도로테아는 생각지 못한 문제에 봉착했다.
테온은 혼란스러워하는 도로테아를 재촉하지 않았다.

“황녀님의 진심이 담긴 대답을 기다릴게요.”

그게 긍정이든, 부정이든.
* * *
도로테아를 바래다주고 테온은 집으로 돌아가며 헛웃음을 터뜨렸다.

‘대체 무슨 생각으로 그런 말을 지껄인 거야, 테온 프리드.’

감정을 확실하게 확인해 보라니.
도로테아 앞에서 내보이던 부드러운 미소는 사라지고, 그의 얼굴엔 딱딱하게 굳은 어둠만이 남아 있었다.
그는 알았다. 도로테아의 마음은 이미 에단 브론테에게 많이 기울어져 있다는 사실을.

‘결혼해 달라고 옷자락을 붙잡고 늘어져도 부족한 때에 무슨 여유를 부린 거지?’

이렇게 초조하게 떨 거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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