폭군님은 착하게 살고 싶어 11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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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니는 나의 손목을 비틀어 칼을 떨어뜨리게 했고, 내 목을 졸랐다.
목이 부러질 것 같고, 숨이 막혔다.

“아무리 발악해 봤자 네가 할 수 있는 건 없어!”

대니는 내 공격에 이를 드러내 보이며 웃었다.
그 순간, 왜 그 말이 나에게 와서 잔인하게 박혔는지는 모르겠다.
발악해 봤자 레이먼드를 이기지 못하고, 에피스테메를 갈 수 없고, 카르넌의 관심을 받을 수 없으며, 테온의 사랑을 받을 수도 없고, 믿었던 신하마저 날 저버리고 처형대에 올릴 거라고.

발악해 봤자, 너는 아무것도 할 수 없다고.
그 때문에 나의 한계선이 툭 끊어졌다.
어디서 솟았는지 모를 힘으로 그의 명치를 가격하자 대니가 허리를 굽히며 나를 놓았고, 난 떨어진 칼을 다시 주워 그의 다리를 다시 한번 깊이 베었다.
붉은 피가 솟았고, 대니의 몸이 한쪽으로 기울며 툭 쓰러졌다.

“빌어먹을!”

나는 욕설을 내뱉는 대니의 남은 다리 한쪽마저 그어버렸다.
바닥에 드러누운 대니가 비명을 지르며 발버둥 쳤고 나는 그의 옷을 칼로 찍어 바닥에 묶어버렸다.
대니는 나를 두려운 눈으로 보며 떨었다.
회귀 전에 많이 보았던 그 눈빛. 칼을 든 나를 보는 사람들의 눈빛.

그제야 나는 잠시 잃었던 이성을 되찾았다.
칼날에 비친 나는 나쁜 사람의 얼굴을 하고 있었다.
아니, 나쁜 마음을 먹었던 게 아니야. 나는 그저 살고 싶었을 뿐이야…….
나는 고개를 저으며 뒷걸음질 쳤다.

“……나 정말 착하게 살고 싶어. 근데 왜 다들 날 가만히 놔두질 않는 거야?”

그냥 조용히 살다가 죽게 내버려 뒀으면 좋겠어.
뒷걸음질을 치던 나는 피 흘리는 대니를 두고 그 자리를 빠져나왔다.
어두운 지하에서 도망치니 나를 맞아주는 것은 삭막한 황야였다.
도망쳐 나왔지만 내게는 목적지가 없었다.
어디로 가야 마을이 나오는지, 어떻게 해야 사람을 만나는지, 누가 날 구해줄 수 있는지 아무도 알려주지 않았다.

멍청한 투투가 향한 발자국을 따라갈 수 있다면 좋았겠으나, 광야를 휘감는 모래바람이 그 흔적을 지운 지 오래였다.
나는 하늘과 그림자를 보았다.
초대 밀라네어가 만들었다던 태양이 나를 비추고 있었다.

‘해가 뜨는 방향으로 가자.’

사막은 서쪽이니 동쪽으로 걷다 보면 무언가가 나오리라 하는 단순명료한 생각에서였다.
그래서 나는 동쪽을 향해 무작정 걷기 시작했다.
드문드문 이정표가 될 만한 마른 나무와 선인장, 모래에 묻혀 폐허가 된 집터와 말라 버린 우물이 나왔다.
마을의 흔적을 찾을 때면 나는 희망을 품었다.

살아남을 수 있을 거라고. 곧 사람이 사는 마을이 나올 거라고.
건조한 먼지가 내 폐로 물밀듯 흘러들어 왔다.

땀이 흘렀고 목이 말랐고 내게는 반 통의 물이 있었다.
갈라지는 입안을 적실 정도로만 목을 축여가며 부지런히 걸었지만 해가 지도록 사람 그림자 하나 찾지 못했다.

해가 진 광야는 이전과 다른 난폭한 모습을 드러냈다.
더위가 사라지고 추위가 덮쳤다. 뜨거운 바람은 온기를 잃고 냉정해졌다.
프리드의 시간이었다.
밀라네어의 시간도 프리드의 시간도 내게는 가혹하기만 했다.
발이 푹푹 파묻히던 모래는 얕아졌지만 땅은 여전히 메말라 있었다.

내가 알 수 있는 건 오직 별을 보고 방향을 찾는 것뿐.
그러나 그마저도 점점 싸늘해지는 바람과 함께 구름에 가려 잘 보이지 않았다.
이내 알고 있는 천문학도 도움이 되지 않고, 오직 이전에 잡았던 방향을 지표로 삼아 나아가야만 했다.
황무지에는 불빛 하나 없었다.

빛의 정령을 다룰 수 있었다면 어두운 앞길을 밝힐 수 있었을까?
레이였다면 달랐을까?
시간이 흐르고 몸이 지쳐갈수록 대니를 해치울 때 잊었던 공포가 점차 다가오기 시작했다.

‘대니는 죽었을까? 아니면 투투가 돌아와 내가 도망친 걸 알고 뒤쫓고 있을까?’

사람을 죽이는 건 무섭지 않았다. 이미 많이 죽여봤으니까.
그런데도 이상하게 나는 몸이 떨렸다.
내가 무서운 것은 나의 무기력함이었다.
끝없는 어둠 속에서 목적지가 어딘지도 알지 못하고 걷는 수밖에 없는 무력감.
나는 정령에게든 신에게든 기도하고 싶었으나 그만두었다.

정령은 내게 오는 법이 없고, 신은 내게 더 이상 자비롭지 않을 것이다. 나는 신에게 사랑받을 만한 사람도 아니었으니.
마침내, 나는 다리에 힘이 풀려 앞으로 고꾸라졌다.
얼음처럼 차가운 모래가 나를 받아냈다.
숨을 쉴 때마다 거칠게 색색거리는 소리가 났고, 모래 먼지 때문인지 기침이 멎지 않았다.

아까부터 떨리던 몸은 더는 주체할 수가 없었다.
좋아. 이렇게 죽는 건 괜찮아.
폭군의 왕관을 쓰고 처형을 당하거나 멍청한 유괴범한테 살해당해 죽는 것보단 훨씬 괜찮아.
오래 살고 싶은 삶도 아니었고, 길이길이 이름을 남기고 싶은 나도 아니었다.
나의 죽음을 오래도록 기억하고 슬퍼할 사람도 없을 것이다.

‘죗값을 치르러 온 인생, 빨리 끝내면 좋은 거지.’

나는 바위에 기대어 웅크린 채 생각했다.
나는 왜 다시 살아났을까 생각하면서, 내가 받아야 할 많은 벌을 생각하면서 이 벌이 끝나길 기다렸다.

그때 멀리 희미한 불빛이 보였다. 말발굽 소리 같은 것도 들리는 것 같았다.
지평선 끝에 아른거리던 불빛이 점차 가까워지고 있었다.

사람이었다.
왜 신은 내게 늘 이런 희망 고문을 하는 걸까?
왜 나는 그렇게 당하고도 욕심을 버리지 못하는 걸까?
이런 상황이 야속하고 원망스러웠지만, 나는 천성이 욕심쟁이여서 또 희망이 보이니 생을 갈구하게 되었다.
바위를 짚고 일어났고, 그 불빛들이 나를 발견하길 바라며 떨리는 손을 들어 올렸다.

“여기…….”

건조해서 갈라지는 목소리로는 소리를 지를 수 없었다.
남은 힘을 다해 그들을 불러보아도 내 목소리는 깊은 어둠에 흩어질 뿐이었다.
나는 어느 때보다 무거운 걸음을 떼었다.
그들에게 조금 더 가까이 다가가려고.
이 밤중에 황무지를 돌아다니는 그들이 도적 떼일지 선한 사람일지 아니면 노예상일지 알지도 못하면서, 나는 한 줄기 희망을 바랐다.

‘……카르넌이 보낸 사람일지도 모르잖아.’

누군가 나를 찾으려고 보냈을지도 모르는 거잖아.
그렇게 많이 외면당했으면서도 이런 생각을 하는 내가 우습기는 했지만 나는 원래 그런 사람이었다. 누군가가 나를 사랑해 줄 거라고 믿고 싶었던.
그러나 나는 몇 걸음 가지 못해 다시 쓰러지고 말았다.
달마저 가린 밤하늘이 정말 새카맸다. 곧 비가 쏟아질 것만 같았다. 이 메마른 땅에 참 우연히도.
나는 점점 정신이 몽롱해졌고, 더 이상 그 불빛들을 부를 힘도 남지 않았다.

“황녀님!”

까무룩 정신을 잃어가는 도중에 나는 어떤 소리를 들은 것 같기도 했다.
* * *
내가 정신을 차린 것은 황궁에서였다.
내 머리엔 물수건이 놓여 있었고 몸은 여전히 으슬으슬하며 추웠다.
커튼이 쳐진 방은 어두웠는데 오직 문틈으로 작은 불빛이 새어 나왔다.

“이름도 알려지지 않은 유괴범들이었습니다.”

“겨우 그런 놈들한테 납치를 당했단 말인가?”

문간에서 카르넌의 목소리가 들렸다.
그가 나의 방을 찾아온 건 처음이라서 심장이 멎을 것처럼 놀랐다.
카르넌이 날 찾으러 오기는 했구나. 내가 유괴를 당하면 날 구하려고 하기는 하는구나.
가슴에서 열이 나는 듯 뜨거워졌다.
어떻게 되었든 그는 내게 피를 물려준 나의 아버지…….

“별게 다 성가시게 하는군.”

문틈으로 새어 들어온 그 한마디에, 뜨거워졌던 가슴이 다시 차갑게 식었다.

‘……성가셔?’

내가 겪은 그 모든 일이 카르넌에겐 ‘성가신 일’ 하나로 일축됐다.

“이 일을 밖으로 유출한 자를 찾아내서 처리해. 그리고 외부엔 황녀가 납치된 건 헛소문이라고 공표하고 다시 그런 소문을 내는 이가 있다면 엄벌하도록.”

카르넌의 짜증 섞인 한숨 소리가 들렸다.
그 한숨 소리가 비수가 되어 가슴에 꽂혔다.

정말, 난 멍청하게 또 뭘 기대한 거야. 아프니까 정신이 잠시 나갔었나 봐.
나는 이를 꽉 깨물었다.
몸이 약해져서 마음도 약해진 건지, 겨우 이런 말로 눈물이 날 것만 같았다.

‘카르넌은 원래 이랬어.’

카르넌은 원래부터 날 미워했다.
회귀 전부터 레이와 싸우면 늘 내 탓이었고, 레이가 잘못한 것도 내 탓이었다.
열 살이 된 레이에게는 준마 한 마리를 사주었으면서 내가 열 살이 되었을 땐 아무것도 챙겨주지 않았다.
유모가 건네준 생일 꽃다발도, 알고 보니 카르넌이 아니라 황궁 사람들이 준비한 거였지.

그걸 안 나는 너무 화가 나서 레이의 방에 있는 물건들을 모두 망가뜨렸고, 카르넌은 내게 한 달 동안 방에 갇혀 있는 벌을 내렸다.
그 후 카르넌은 나를 탐욕의 화신으로 취급했다.
그래, 확실히 난 욕심이 많은 사람이었다. 모든 걸 갖고 싶어 했으니까.
영원한 갈증과 허기에 시달리는 탄탈로스처럼 레이가 갖고 있는 모든 걸, 내가 갖지 못한 모든 걸, 나의 결핍을 채울 수 있는 모든 걸 갈구했다.

그 모습이 추악했다는 것은 나도 알아.
그래도, 나는 내가 욕심쟁이라서 카르넌의 미움을 사는 것이리라 합리화하고 있었다.
정확히는 그렇게 믿고 싶어 했다.
하지만 회귀 후에 너무 많이 증명됐잖아.
더 이상 레이와 싸우지도, 그의 것을 빼앗지도 않는데 카르넌은 여전히 나를 좋아하지 않는다.

‘폭군이었던 벌을 받는 거야.’

그래, 내가 전생에 벌였던 죗값을 또 여기서 치르는 거야.
나는 다시 그렇게 합리화하기로 했다.
그렇지 않으면 펑펑 울어버릴 것 같으니까.
* * *
내 몸은 쉽게 괜찮아지지 않았다.
수면제를 먹고 사흘이나 굶다가 겨우 우유와 빵으로 허기를 달래고, 대니와 싸운 뒤 하루 종일 황야를 걸었으니 몸이 버티지 못한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황궁에 돌아오고도 일주일 가까이 고열에 시달린 후에야 나의 체온은 겨우 미열 범주로 들어섰다.
몸은 조금씩 회복세로 돌아섰지만 눈에 띌 만한 변화가 일어나진 않았다.

“황녀님, 괜찮으세요?”

새 유모가 물었다.
전에 나를 오랫동안 돌봐준 유모는 이번 유괴 일로 황궁에서 잘렸단다.
따지자면 유모 탓도 아닌데. 유모가 할 수 있는 거라곤 아무것도 없었을 텐데.
내 잘못이 하나 더 늘어난 것 같아 기분이 영 좋지 않았다.
불행 중 다행이라면 유모가 그 이상의 처벌을 받지는 않았다는 점이었다.

“아무래도 요양을 가서 완전히 몸을 보하시는 게 좋을 듯합니다.”

“요양이요? 하지만 황녀님은 방금 그런 일을 겪으셨는데……. 황궁에 머무르셔야 하지 않을까요?”

의사와 새 유모가 작은 목소리로 쑥덕거렸다.

‘요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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