폭군님은 착하게 살고 싶어 118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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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자 슈테판은 당황하여 긴장한 채 입을 다물고 한마디의 대답도 하지 못했다.
천천히 하나씩 물어도 대답을 할까 말까인데, 황제 폐하께서 어려운 질문을 늘어놓으시니.
슈테판이 혼란스럽게 눈동자를 굴리자 카르넌은 고개를 끄덕이며 다시 입을 열었다.

“좋아, 천천히 묻겠네. 도로테아가 뭘 해주면 좋아하겠나?”

카르넌은 지금까지 도로테아에게 비싼 선물을 줘보기도 하고, 불러서 이야기를 해보기도 하고, 좋은 자리에 참석을 권해보기도 했다.
하지만 도로테아는 무엇도 좋아하지 않았다.
과연 슈테판은 답을 알까?
카르넌이 도로테아를 위해 뭘 해야 하는지.
슈테판은 한참을 고민하더니 무거운 입술을 떼었다.

“……믿고 지켜보며 기다려주는 것입니다.”

당장 물질적이고 직관적인 것으로 해결하지 말 것.
12년을 기다려 와인을 빚듯, 도로테아와의 관계 또한 긴 시간을 들여 차분히 기다리며 믿어줄 것.
카르넌은 당장 해결할 수 있는 방책을 원했겠지만, 슈테판은 도로테아가 카르넌으로부터 받은 상처의 무게를 알고 있었다.

십수 년 동안 쌓인 아픔이 하루아침에 치유되기를 바라는 건 도둑놈의 심보다.
아니나 다를까, 카르넌은 그 ‘도둑놈 심보’를 바랐는지 슈테판의 대답에 다소 충격을 받은 얼굴을 했다.

“기다리라……?”

카르넌의 되물음에 슈테판은 조용히 고개를 숙였다.
사람을 때려놓고 미안하다고 먼저 손을 내밀며 상대에게 손을 잡으라고 하는 것은 협박이고 강요다.
먼저 손을 내밀 자격이 있는 건 카르넌이 아니라 도로테아였다.
카르넌에게 허락된 건 도로테아가 먼저 손을 내밀 때까지 기다리는 것뿐이다.

* * *
황제와 황태자, 기사들에게 볼일이 없는 바쁜 귀족들은 곧 건배나 몇 번 하고 사라졌고, 만찬장은 이내 기사들의 즐겁고 거친 축제 분위기로 돌아섰다.
즐거움과 술기운으로 잔뜩 흥분한 기사들의 목청이 점점 커져서, 조이는 귀가 떨어져 나갈 것 같았다.

“이야! 조이 그린월!”

그녀와 함께 서임을 받은 기사 무리가 조이의 어깨에 턱 팔을 얹으며 말을 걸었다.
거나하게 취한 그들은 얼굴이 붉게 물들어 있었고, 한 손에는 큼직한 술잔이 들려 있었다.

기사들의 이상한 자존심 중 하나가 술부심이었는데, 술을 많이 마실수록 기사로서의 실력을 증명하는 줄 아는 놈들이 태반이었다.

조이는 그런 녀석들을 좋아하지 않았다.
술이라면 일찍부터 질색이었고 술을 마신 사람이면 더 좋아하지 않았다.
자신을 절제하지 못할 정도로 퍼마시는 놈은 어디다가 묻어버리고 싶었다.
아마 도박하고 술에 취해 들어오던 아버지 거트의 영향이 컸으리라.

‘슈테판 경은 술도 잘 안 마셔서 좋은데…….’

세리티안에 있을 때 조이는 기사들이 다들 슈테판처럼 술을 멀리하며 절제할 줄 안다고 생각했다.
때문에 ‘기사’라고 하면 금욕적이면서도 강하고 멋있는 이미지를 그렸었다.
하지만 람파스에 올라오고 나서, 멋지고 듬직하고 신성하던 이미지는 산산조각이 났다.

기사들은 술을 좋아했고 전쟁터에서도 술을 마시는 일이 흔했다. 술이 사기 진작 효과가 크다나 뭐라나.
하긴, 그녀의 아버지 거트도 평소에는 참 볼품없고 쪼들려 살던 사람이었는데, 술만 마시면 돌연 거칠고 용감해져서 주먹질하고 물건을 부수고 목소리를 크게 키웠더랬지.

“창창한 인생 가도를 달리는 우리 조이 그린월 경~! 이렇게 좋은 날에도 술 한 모금 마시지 않는다니!”

술 냄새를 풀풀 풍기는 기사들이 조이에게 들러붙으며 꼬인 혀로 그녀를 불러댔다.
조이는 그들을 밀어냈지만, 취한 놈들은 비틀거리며 테이블에 털썩 걸터앉더니 비어 있던 술잔에 술을 부어 넣었다.

“자! 마셔!”

기사 하나가 표면장력이 생길 정도로 가득 채운 술잔을 조이에게 내밀며 게슴츠레한 눈으로 보았다.

“이런 날 마시지 않으면 기사로서 실격이야! 서임 취소!”

“맞아! 맞아!”

“마셔라! 마셔라! 마셔라!”

기사들이 주먹을 하늘로 뻗어 올리며 조이를 재촉했다.
술에 목청을 키워주는 효과가 있는 게 분명했다. 그렇지 않으면 거트도 그렇고 저 얼빠진 목소리가 저렇게 커질 수는 없다.

‘한심한 놈들.’

잔뜩 취한 채로 있다가는 적군이 몰려왔을 때 비틀거리며 목을 내어주러 달려가고 말걸.
조이는 고개를 절레절레 저으며 기사가 내미는 술잔을 밀어냈다.
그러자 사방에서 ‘우우~’ 하는 야유 소리가 들려왔다.
조이는 이런 놈들과 어울리느니 빨리 들어가서 황녀님과 포나 보러 가는 게 낫겠다고 생각했다.
조이가 그들을 무시하며 걸음을 돌리려 하자, 기사 하나가 그녀의 팔목을 붙잡았다.

“어디 가!”

“들어가서 발 닦고 낮잠이나 자려고.”

조이가 저를 잡은 기사의 손목을 비틀어 손을 떼어냈다.

“야, 너 이러면 안 되지! 뭣도 없는 거지로 살던 널 황실에서 기사로 인정해 줬는데 낮잠이나 자러 가겠다고?”

“뭐? 뭣도 없는 거지?”

와하하 웃음을 터뜨리는 기사들을 향해 조이가 험상궂게 인상을 구겼다.
거지라니……! 아무리 가난했어도 그녀는 뭐 하나 공으로 얻어먹은 적 없었다.
뼈 빠지게 물동이 나르고, 발이 부르트도록 짐 나르며 정당한 노동의 대가를 얻어 포를 먹여 살렸다.
도로테아가 베풀어준 은혜를 갚으려고 매달 네 시간씩 왕복하며 아껴 모은 채소를 바치기도 했다.

가난했고 무식했고 돌아가라면 절대로 돌아가고 싶지 않은 시절이지만, 그렇다고 해서 부끄러운 짓을 한 적은 없었다.

조이는 술 취한 멍청이들을 죄다 땅바닥에 엎어쳐 버리고 싶었지만 참았다.
서임식 만찬장에서 소동을 부렸다가는 그녀를 믿어준 도로테아와 슈테판의 얼굴에 먹칠하고 말 것이니.
혈기왕성한 그녀가 슈테판 아래에서 가장 많이 갈고닦은 것을 꼽으라면 인내였다.

“거지라고 발끈하는 것 봐! 뭘 아닌 것처럼 굴어. 신분 상승해서 기뻐해야지? 너처럼 운 좋은 인생이 또 어디 있다고.”

술에 절어 달큰한 내를 풍기는 혀들이 시끄럽게 떠들더니 황실을 향해 절을 하라며 조이의 고개를 억지로 눌러댔다.
거지 주제에 황실에 들어와 종자 자리를 얻은 것도 모자라 모시던 황녀님이 갑자기 각성했으니, 기사들은 조이만큼 편한 인생도 없다고 생각했다.

“이씨, 이거 안 놔?”

정말 한 대 칠까? 이길 자신 있는데.
훈련에서 맨날 지던 놈들이, 운 좋은 인생 타령이라니.
운 좋은 건 날 때부터 귀족 가문에서 태어나 멋진 검을 쥐고 좋은 교육을 받아 당연하게 기사가 된 자기들이지.
조이가 주먹을 부들거리고 있던 그때.
덥석, 조이의 머리를 누르던 기사의 손이 무언가에 붙들려 떨어져 나갔다.

“악, 아아악!”

술이 깰 정도로 고통스러운 듯 질러대는 비명에 조이가 눈을 들자 그곳엔 슈테판이 있었다.

“슈테판 경……!”

“…….”

슈테판은 조용히 조이를 괴롭히던 기사를 내려다보았다.
슈테판의 키는 기사 중에서도 단연 도드라졌고, 위압감도 어마어마했다.
아무 말도 하지 않았지만 기사들은 자동으로 입을 다물고 다들 쭈그러들었다.

“……조이.”

“예, 슈테판 경, 아니, 부단장님!
바짝 기합이 들어 차려자세로 대답하자 슈테판이 가자는 듯 눈짓했다.

“예!”

조이는 조용한 슈테판에게 대답한 후 걸음을 옮기는 그의 뒤를 따라갔다.
슈테판은 조이를 데리고 만찬장을 빠져나와 기사단 쪽으로 향했다.
조이는 슈테판의 뒷모습을 바라보며 올라간 입꼬리를 내리지 못했다.
늘 포를 챙기며 독립적으로 살아온 그녀였지만, 슈테판의 너른 등을 보고 있자면 기댈 곳이 생긴 듯 편안해졌다.

슈테판이 조이를 데려간 곳은 기사단에 마련된 그의 새 집무실이었다.
아직 정리가 다 되지 않아 산만했지만, 조이는 마냥 신기해 고개를 이리저리 돌리며 둘러보았다.
그녀는 도로테아가 슈테판을 부단장으로 올려보내기로 결정했을 때 무척 섭섭했는데, 또 이렇게 잘 된 모습을 보니 자랑스럽고 뿌듯해서 기분이 좋았다.

역시 똑똑한 황녀님의 선택이 옳았다.

“도와주셔서 감사합니다. 그리고 정말 진심으로 축하드립니다, 부단장님!”

조이는 그녀가 동경하는 슈테판의 든든한 뒷모습에 감사를 표했다.
그에 슈테판이 조이를 돌아보더니 일직선으로 다물려있던 입술 끝을 살짝 올렸다.

“……축하한다, 조이 그린월.”

그는 조이에게 검을 건넸다.
조이는 휘둥그레진 눈으로 그를 보았다.
그가 내민 것은 그가 오랫동안 사용하던 검이었다.
조이가 처음 세리티안의 별궁에 들어가서 새벽에 슈테판을 훔쳐보았을 때 그가 갈고 있던 검.

“이걸 제, 제게 주시는 거예요?”

조이가 말을 더듬으며 묻자 슈테판이 조용히 고개를 끄덕였다.
슈테판에겐 이제 도로테아가 준 세터칼립스가 있었다.
명검이라 불리는 세터칼립스와 달리 그의 검은 무명에 불과했지만, 도로테아를 호위하는 동안 함께해 온 훌륭한 검이었다.
비록 그는 도로테아의 곁에 늘 붙어 있지 못하겠지만, 그의 검은 조이와 함께 그린월로서 도로테아를 지켜주기를 바랐다.

그렇게 그에겐 도로테아가 준 검이, 도로테아의 곁엔 그가 남긴 검이 있기를.
또한 변변치 않은 검을 들고 다니는 조이에게도 좋은 선물이 될 것이다.
조이는 떨리는 손으로 슈테판이 내민 검을 받아 들었다.
명검이든 아니든 세상이 정한 기준 따위는 상관없었다.
슈테판의 검이야말로 그녀가 언제나 동경하던 검이었다.

그녀가 눈을 감고 상상하는 슈테판의 모습엔 늘 이 검이 허리춤에 있었으니까.
그녀는 검을 잡는 것만으로도 가슴이 뛰었다.
진짜 피가 이어지진 않았지만, 이 검으로 그린월의 이름을 이을 수 있을 것 같았다.

“황녀님을, 잘 부탁한다.”

슈테판의 짧은 부탁에 조이는 굳게 고개를 끄덕였다.

“예, 부단장님!”

* * *
서임식이 있고 나서 며칠 뒤.
‘조이 그린월’의 첫 번째 임무는 금방 다가왔다.

“테온 프리드 도련님을 만나러 가시는 거예요?”

“응.”

도로테아는 거울에 비친 옷깃을 정리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클라라가 뒤에서 머리카락을 빗겨주며 즐거운 듯 웃었다.

“황녀님은 인기가 많으셔서 좋겠어요.”

에단과 테온을 두고 하는 말이다.
어쩌면 도로테아가 정령을 각성한 후, 관심을 보이는 다른 귀족 자제들도 포함된 이야기일지도 모른다.

‘확실히 남들이 보기엔 그렇게 보이겠지.’

도로테아는 거울에 비친 자신을 살펴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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