폭군님은 착하게 살고 싶어 117화

Background color
Font
Font size
Line height

“광휘의 기사단의 기사들은 황실을 위해 봉사하는 자들이니 밀라네어인 너 또한 그들의 서임과 임명을 축하하는 것이 좋을 것이다.”

“제가 밀라네어이기는 하나, 지금까지 한 번도 그 자리에 참석한 적이 없었습니다, 폐하.”

도로테아의 말에 카르넌을 비롯한 사람들의 얼굴이 딱딱하게 굳었다.
싸한 공기 가운데 모두가 카르넌의 눈치를 보았다.
보통 황제가 저렇게 제안하면 아랫사람들은 설령 그날 누구의 결혼식이 있다고 하더라도 황제의 말을 따르는 게 일반적이다.
황녀라고 해도, 도로테아의 말은 아슬아슬했다.
카르넌은 늘 그의 말을 곧이곧대로 듣는 적이 없는 그녀에게 한 소리 하고 싶은 표정이었다.
하지만 보는 이가 많았기에 그는 긴말을 삼켰다.

“기회를 스스로 저버리겠다면 하는 수 없구나.”

“어리석은 저를 이해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폐하.”

도로테아가 깊이 고개를 숙이며 뒤로 물러나자 카르넌은 내키지 않는 듯 입을 굳게 다물고 그녀를 지나쳐갔다.
카르넌의 뒤에 서 있던 레이먼드는 도로테아를 보며 머쓱하게 웃었다.

‘오후에 검술 연습이나 하자.’

입 모양으로 그렇게 속삭이며 레이먼드는 카르넌을 따라 사라졌다.
* * *
서임식이 끝난 뒤, 신임 기사를 축하하는 만찬장.
형식상 만찬에 참여한 카르넌은 도로테아가 마음 쓰였다.

‘도로테아 황녀님께 조금 더 관심을 가져주심이 어떠할는지요?’

도로테아는 그가 그녀에 대한 관심을 완전히 끄고 살았다고 생각했지만, 절대 그렇지 않았다.
좋은 의미에서든 나쁜 의미에서든, 앨리스가 남긴 아이를 완전히 잊을 수 있을 리 없으니까.
하지만 그는 인정했다. 자신이 도로테아에게 소홀했음을.
앨리스가 죽었다는 이유로, 빛의 정령을 보지 못했다는 이유로 황녀 대우를 제대로 해주지 않은 건 사실이었고, 그의 잘못이었다.

그래서 도로테아를 위해 생일 선물도 챙겨주었고, 예산을 조금 더 배분해 주었다.
이따금 도로테아를 불러 이야기를 나누려고 시도도 해보았다.
하지만 그녀는 감정 없는 인형처럼 정해진 대답만 하다가 돌아갔다.
그의 여러 노력에도 도무지 거리는 가까워질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그렇게 여전히 먼 거리에 선 채, 시간은 흘렀다.
하루하루 성숙해진 도로테아는 앨리스를 쏙 빼닮아 갔다.
머리카락 색과 눈동자 색만 아니라면, 앨리스로 착각할 정도였다.
이따금 도로테아를 보면 간신히 흐려진 앨리스의 기억이 몰려와 그의 가슴을 저릿하게 했다.

그제야 카르넌은 도로테아의 의미를 다시 생각해 보게 되었다.

앨리스의 죽음이 남긴 상처의 피고름이 멎고, 딱지가 앉은 자리에 남은 상흔을 이제는 그 모습을 바로 볼 수 있었다.
도로테아 밀라네어.
그녀는 앨리스를 죽인 아이가 아니라, 앨리스가 죽어가면서도 지킨 아이였다.

그 사실을 그는 거의 20년이 지나서야 깨달았다.
앨리스가 마지막으로 남긴 선물. 작은 앨리스.
그리고 그가 심었던 과거의 씨앗이 하나씩 후회로 피었다.
저 아이의 어릴 때 모습을 한 번이라도 눈에 더 담아둘걸.
어떻게 커왔는지 조금만 더 관심을 기울일걸.
과거 그가 남긴 유의미한 유산은 도로테아가 여섯 살 때 만들어둔 와인뿐이었다.
그나마 그것이라도 남아 있는 게 다행이라고 해야 하나?
와인을 담갔던 이유는 단순히 약속 때문만은 아니었다.

‘미치겠군.’

그는 도로테아를 처음 보았을 때, 해일처럼 몰려오는 감정에 이를 꽉 깨물었다.
앨리스를 죽인 아이가 가증스러울 정도로 사랑스러워서 그의 심장 가장 약한 구석을 짓눌렀다.
카르넌을 적대적으로 올려다보는 어린 도로테아의 눈빛은 마치 죽은 앨리스를 지키지 못한 그를 원망하는 듯했다.

그는 그 눈빛에 잡아먹혀, 약속을 지킬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데뷔탕트를 앞두고, 그는 와인을 선물함으로써 도로테아가 조금이나마 그의 진심을 알아주길 바랐다.
아예 그녀를 잊은 건 아니었구나, 그저 부족하고 미숙한 아버지일 뿐이구나 하고 이해해 주기를.
하지만 도로테아는 그가 준비한 와인을 보고도 한 번도 웃지 않았다.

그리고 와인을 변경의 병사들과 의료시설로 보내버렸다.
그 와인이 얼마나 좋은 와인인지, 그 와인을 위해 얼마나 많은 노력과 자본과 시간이 들었는지 모르는 걸까?
그가 어떤 마음으로 이 와인을 꺼냈는지 생각하지 못하는 걸까?
영특하고 똑똑한 그녀가 그 함의를 읽어내지 못할 리 없는데, 대체 얼마나 더 노력해야 알아줄 생각인지.
그가 잘해보자고 손을 내밀 때마다 도로테아는 보지도 않고 그의 손을 내쳤다.

그리고 오늘도.

‘제가 밀라네어이기는 하나 지금까지 한 번도 그 자리에 참석한 적이 없었습니다, 폐하.’

그에게 들으라는 듯 뱉는 말은 그의 무심함을 지적했다.
대체 언제까지 옛날 일로 답답하게 굴 생각인가.
그녀는 넝쿨째 들어온 기회를 발로 차버렸다.
영리한 줄 알았더니, 헛똑똑이였다.

‘정령의 힘을 각성한 것도 왜 활용하지 않으려는 건지……!’

그는 데뷔탕트에서 도로테아가 각성했을 때, 가슴이 벅차도록 기뻤다.
그래, 앨리스의 딸이 정령을 다루지 못할 리 없지.
카르넌은 그로써 도로테아가 대외적으로 자리 잡기를 바랐다.
더 잘 되길, 황녀로서 힘을 얻길.
하지만.

‘폐하, 제게 정령의 힘이 있는 것이 중요합니까?’

도로테아의 반응은 카르넌을 당혹하게 했다.
그게 얼마나 중요한지 누구보다 잘 알 텐데도 도로테아는 싸늘했다.
설마 원래 정령의 힘이 있었는데, 지금까지 속이며 황실을 비웃은 건 아닐까 하는 생각도 들었다.
도로테아는 그 후에도 정령의 힘을 제대로 보인 적이 없었고, 궁을 옮기고 나서도 예전과 마찬가지로 조용히 혼자 티 타임이나 가지며 지냈다.

‘죽을 때까지 그렇게 살 생각인가?’

카르넌은 만찬장에 나온 술을 한 모금 삼키며 생각했다.
그에게는 제국의 어떤 문제보다도 도로테아를 해결하는 게 더 힘들었다.
그때, 카르넌의 눈에 슈테판이 들어왔다.
오늘 부단장으로 임명된 그는 사람들의 시끄러운 축하 가운데에서도 과묵히 제자리를 지키고 있었다.

‘……십 년 동안 도로테아를 호위했다고 했나?’

카르넌은 눈을 가늘게 뜨며 슈테판을 응시했다.
저 큰 덩치에, 부단장을 할 만한 실력이라면 도로테아를 지키는 데 무리가 없었겠군.
그때 카르넌의 뜨거운 시선을 느낀 슈테판이 카르넌 쪽으로 돌아보았다.
시선을 들킨 카르넌은 괜히 큼큼 목을 골랐다.
슈테판은 하실 말씀이 있느냐는 듯 가볍게 묵례하고 그의 말을 기다렸다.
말을 걸려고 한 것은 아니었는데 슈테판의 기다림이 무척 진지했으므로, 카르넌은 입을 열 수밖에 없었다.

“슈테판 그린월 경. 가슴에 달린 그 조개 핀은 무엇인가?”

서임식 때 눈에 거슬렸던 조악한 조개 핀.

크기는 작았지만 각종 빛깔로 번쩍거리는 훈장들 사이에서 유독 눈에 띄었다.
광휘의 기사단에서는 위조훈장이 아니라면 장식용 핀 한두 개 꽂는 것은 문제 삼지 않았지만, 보통은 화려한 보석 핀을 달았지 싸구려 조개껍데기를 다는 일은 없었다.

“……도로테아 밀라네어 황녀님께서 달아주셨습니다.”

도로테아가? 황녀라면 저런 싸구려 핀이 아니라 좋은 걸 선물해도 되었을 텐데.
카르넌은 저런 걸 선물한 도로테아도, 그걸 자랑스럽게 달고 다니는 슈테판도 이해가 되지 않았다.
하지만 그보다 더 중요한 건 도로테아가 친히 슈테판의 가슴에 핀을 달아주었다는 것이다.

카르넌은 일찍 슈테판과 도로테아가 무척 사이가 긴밀하다는 보고를 들은 적이 있었다.
카르넌 앞에서는 얼음장처럼 차가운 도로테아가 슈테판 앞에서는 웃고 재잘거리고 시원하게 검을 휘두르기도 한다고.
어릴 땐 슈테판이 도로테아를 번쩍번쩍 들어 안기도 했다고 했다.
무뚝뚝하고 까칠한 딸이 저 과묵한 기사에게 안기다니, 카르넌은 믿기지가 않았다.

“도로테아를 오랫동안 호위해 왔다면 도로테아에 대해서도 잘 알겠군.”

“……예, 폐하.”

답답할 정도로 느린 대답.
도로테아는 저런 자를 지금까지 어떻게 곁에 두고 살아왔는지 궁금했다.
저런 자가 기사들을 지휘할 수나 있을까?
단장 아서의 말로는 다행히 명령과 지휘는 대부분 신체적 사인과 정형화된 간단한 말로 통하기 때문에 문제가 없다고 했다.

“……자네는 도로테아를 어떻게 생각하나?”

카르넌의 질문에 슈테판의 검은 눈동자가 겸손하게 아래를 향한 채 정지했다.

“황녀님은…….”

말을 고르는 듯한 오랜 침묵.
카르넌이 보채려는 찰나, 슈테판의 입술이 다시 열렸다.

“가장 지키고 싶은 분입니다.”

늦게 흘러나온 슈테판의 목소리엔 흔들림이 없었다.
그러자 카르넌의 눈이 가늘어졌다.

“……가장 지키고 싶다?”

카르넌에 되물음에 슈테판은 다시 대답할 듯 말 듯 입을 움찔거리더니 간신히 목소리를 뱉었다.

“……오랫동안 호위하며 모셨기 때문입니다.”

들인 시간에 비해 너무 간단한 대답.
하지만 슈테판은 더 길게 답할 수가 없었다.
그것 외에 그가 지닌 마음을 자세히 설명하려면 말이 너무 길어질 테니까.
도로테아를 볼 때 드는 따뜻하고 애틋하고 그러면서도 흐뭇한 마음을 뭐라고 설명할까.
그녀가 한 번이라도 더 웃기를 바랐고, 하룻밤이라도 더 편안함 속에 잠이 들길 바랐다.

그녀가 다치면 그 또한 다친 듯 아팠고, 그녀가 눈물을 흘리면 그 또한 가슴이 쓰렸다.
사랑이라면 사랑이었다. 이성으로 사랑하는 것이 아닌, 소중한 무언가.
그와 가장 비슷한 사랑을 찾으라면, 가족애였다.
하지만 솔직하게 말할 수는 없었다.
모시는 황녀님을 가족처럼 생각하다니, 불경하단 소리를 들을 터다.

그러므로 슈테판의 입은 짧게 다물렸다.
카르넌은 그의 답답한 태도에 조금 짜증이 났지만 다시 차분하게 물었다.
당장 도로테아에 대해 자문을 구할 곳이 저 답답한 기사뿐이었으니.

“도로테아는 보통 뭘 해줘야 좋아하지? 사람들과 어울리지도 않는다는데 궁에서는 뭘 하면서 지내나? 자네는 도로테아가 정령의 힘을 쓰는 걸 따로 본 적이 있나?”

카르넌은 그동안 궁금했던 것을 와르르 쏟아내었다.


You are reading the story above: TeenFic.Ne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