폭군님은 착하게 살고 싶어 116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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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르넌이 슈테판에게 기사의 맹세를 요구하자 슈테판은 자신의 머리카락 칼로 잘라냈다.
그의 검은 머리카락이 붉은 쿠션 위에 놓였다.
기사단장 아서가 쿠션을 들어 카르넌에게 올렸고, 카르넌은 그를 불에 태워 빛의 정령에 바쳤다.
카르넌은 옆에 준비되어 있던 훈장을 슈테판의 가슴에 달아주었다.

그런데 훈장을 달아주던 그의 손이 잠시 멈칫했다. 하얀 조개 핀 때문이다.
훈장들 사이에 어울리지 않는 핀에 카르넌이 잠시 미간을 구겼다.
그러나 서임식 도중에 말을 꺼낼 순 없으므로, 그는 그렇게 수여식을 마무리했다.
그의 가슴에 금으로 만들어진 빛나는 큼직하고 화려한 훈장 하나가 달렸다.

도로테아는 그 모습을 보며 흐뭇하게 웃었다.
내가 애정하는 사람이 잘 되는 모습을 보는 건, 생각보다도 더 기쁜 일이구나.
이번 생에 도로테아가 슈테판을 죽일 일은 없으니, 그녀는 슈테판이 광휘의 기사단 단장까지 올랐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그 후, 기사 후보생들이 다시 검을 집어넣고 직접 레드카펫 위에 섰다.

이제 예비 기사들의 정식 서임식이 시작되는 것이다.
이번엔 황제 카르넌이 직접 검을 들고 앞으로 나섰다.
새 기사들은 한 명씩 카르넌 앞에 무릎을 꿇고 고개를 숙였다.
그리고 조이의 순서가 되자 조이는 패기 넘치는 걸음으로 걸어 나왔다.
이것도 팔이 안으로 굽는다고, 도로테아는 기사들 가운데 비범함으로는 조이가 최고라고 생각했다.

귀족들 가운데, 저 기사 후보생은 누구냐고 쑥덕거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기사 후보생 대부분이 귀족이었고, 이 자리에 모인 귀족들 또한 지인들의 서임을 축하하기 위해 모인 것이기에 조이의 등장은 당연히 낯설 수밖에 없었다.

도로테아는 귀족들 앞에 ‘저 당당한 여인이 나의 사람이다’라고 자랑하며 외치고 싶은 충동을 느꼈지만 참았다.

조이는 카르넌 앞에 무릎을 꿇고 고개를 숙였다.
카르넌의 시선이 찰나의 순간 도로테아로 향했다가 다시 조이에게로 돌아갔다.
그리고 그는 칼을 들어 올렸다.

“빛의 정령 왕 룩스와 최초의 정령사 밀라네어의 이름으로 나 카르넌 밀라네어, 조이 그린월을 기사로 서임하노니……”

서임문과 함께 처음으로 불리는 조이의 새로운 성.
기사 작위를 받는 것은 곧 가문의 이름을 받는 것이니, 조이에게도 성이 생긴 것이다.
사실 그녀의 성에 대해서는 할 말이 많았다.
* * *
조이의 기사 서임식을 앞두고 도로테아와 슈테판과 클라라와 포가 모두 골머리를 맞대고 고민했었다.
가문이 없는 평민은 기사 서임 때 새로이 이름을 받기 때문이었다.

“보통은 출신 지역 같은 걸 따서 짓는 편이죠.”

“윽, 내 이름에 검은 마을 같은 걸 넣고 싶진 않아요.”

클라라의 말에 조이가 인상을 구겼다.

“아니면 별명이나 상징이 될 만한 것들을 딸 수도 있죠.”

“감자나 사과파이……?”

포의 제안에 모두가 동시에 고개를 저었다.
조이 포테이토나 포 애플파이 따위의 이름은 끔찍하다.
대대손손 이어지는 포테이토 가문, 애플파이 가문이라니. 동화책에도 나오지 않을 이름이다.

“아니면 좋아하는 역사적 인물을 존경하는 의미로 비슷하게 짓는다거나…….”

“도로테아 황녀님!”

“조이 도로테아가 되시겠다?”

“불경한가요?”

“그 문제가 아니거든?”

핀트가 맞지 않는 조이에 도로테아가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그러자 포가 다시 끼어들었다.

“너무 대놓고 딴 것 같으면 도리 어때요? 황녀님 가명으로 썼던 거요. 그러면…… 조이 도리, 포 도리.”

“포, 너는 절대 작명하지 마. 나중에 베이커리를 열어도 간판 달기 전에 내 허락받고 달아.”

도로테아는 포의 끔찍한 작명 센스에 이마를 짚으며 말했다.
가만히 있던 슈테판의 미간도 구겨졌고 클라라는 아예 포를 옆으로 쑥 밀어버렸다.
조이의 성씨는 곧 포에게도 붙기 때문에 그의 의견도 최대한 들어주려 했건만, 더 봐줬다간 후대에 끔찍한 성씨로 꼽히고 말 것이다.
결국 포는 시무룩한 표정으로 조이 옆에 딱 붙어 가문의 이름이 지어지길 기다렸다.

“슈테판 기사님은 가문 이름 어떻게 지으셨어요?”

클라라가 슈테판을 올려다보았다.
슈테판 그린월, 그 또한 용병 출신으로 가문 없이 공을 세워 기사가 된 사람이었다.

“…….”

“됐어요, 여쭤본 제가 잘못이네요.”

오랜 경험이 있는 클라라는 포기가 빨랐다.

그에 도로테아가 웃으며 대신 답했다.

“슈테판이 오랫동안 용병 생활을 했던 곳이 숲이 있던 곳이래. 나무가 벽처럼 높고 빽빽하게 자란 숲.”

슈테판이 부단장 후보가 되면서 도로테아에게 온 여러 문서 중에 슈테판의 서임에 관한 문서가 있었고, 거기에 슈테판의 가문에 관한 이야기가 적혀 있었다.

“오오, 멋있다. 나도 조이 그린월 하고 싶다. 존경하는 사람 중에 슈테판 경도 있는데.”

“…….”

그러자 슈테판이 조이를 빤히 바라보았다. 조이도 슈테판의 시선을 느끼고 그를 쳐다보았다.

“…….”

“…….”

두 사람의 침묵과 눈빛 교환.
도로테아와 클라라와 포도 아무 말 없이 두 사람을 보고 있는데.

“……정말요? 그래도 돼요?”

조이가 마치 어마어마한 진리를 깨우친 사람처럼 눈을 크게 뜨고 큰소리로 외쳤다.
그러자 슈테판이 고개를 끄덕였다.
눈빛, 눈짓 몇 번만으로도 두 사람은 많은 이야기를 나눈 모양이다.
도로테아도 대충 그들의 이야기를 눈치챘다.
슈테판의 가문에, 조이와 포가 들어가는 것이다.

“근데 어떻게요? 슈테판 경의 가문은 이미 있는 가문이라 제 마음대로 들어갈 수 없잖아요.”

“……양녀.”

“그럼 제가…… 슈테판 경의 딸?! 아빠?!”

“새 아빠?!”

조이와 포가 동시에 놀라며 입을 벌렸고 슈테판은 급히 고개를 저었다.
아무리 그래도 나이 차이가 열 살도 나지 않는데 아빠라니.
그에게 숙부가 있는데 그쪽으로 들어가면 될 것이라고, 슈테판은 묵음으로 말했다.

“어차피 가주는 슈테판이니까 슈테판의 승낙만 있으면 일 처리는 어렵지 않아.”

도로테아가 웃으며 덧붙이자 조이가 눈을 반짝거리며 상기된 얼굴로 도로테아와 슈테판을 번갈아 보았다.

“그, 그럼 포랑 저한테 새 가족이 생기는 거예요?”

“그렇게 되는 거겠지?”

“그럼 저한테 슈테판 경은 뭐가 되는 거예요?”

“사촌…… 이겠지?”

슈테판의 숙부 밑으로 들어가니까.

“사초온?”

조이와 포가 동시에 경악했다.
아니, 저게 그렇게 놀랄 일인가?
도로테아는 그렇게 생각했으나, 조이와 포에겐 마냥 높아 보이던 슈테판이 사촌이라는 친근하고 가까운 이름으로 불리는 게 낯설 따름이었다.

“조이 네가 직접 가문의 이름을 받을 수 있는데, 그린월 가문으로 들어가는 것도 괜찮겠어?”

“슈테판 경이랑 가족이 되잖아요! 그게 훨씬 더 좋아요.”

조이는 슈테판의 제안을 기쁘게 받아들였고, 조이 그리고 포는 그린월 가문의 양자로 들어갔다.
* * *
그렇게 기사 서임식에 선 ‘조이 그린월’.

“조이 그린월은 제국 우베라와 황실에 몸 바쳐 봉사하며 죽음 끝에 충성이 있으라.”

카르넌이 서임문을 읊으며 조이의 머리와 어깨에 칼등을 내렸다.
* * *
서임식이 끝나고 도로테아는 조이를 축하하러 가기 위해 걸음을 옮겼다.
그런데.

“도로테아 밀라네어.”

익숙하지 않은 목소리가 그녀를 붙잡았다. 무시하고 가고 싶었지만, 그럴 수는 없는 목소리.

도로테아는 근엄한 얼굴로 선 카르넌을 돌아보았다.

“부르셨습니까, 폐하.”

카르넌의 뒤로는 그를 모시는 신하들이 줄지어 서 있었고, 그의 가장 곁에 레이먼드도 있었다.
다시 말해 그가 도로테아를 부름과 동시에 그 모든 사람이 멈춰 서서 그녀에 집중했다는 뜻이었다.

“서임식에 참석한 것은 이번이 처음인 것 같은데.”

“제 기사가 서임식에 참석해서요.”

도로테아는 자기 때문에 저 많은 사람이 멈춰 서서 기다리고 있다는 게 불편했다.
카르넌은 왜 내게 말을 거느라 저들의 시간을 다 빼앗고 있는 거지?
보아하니 다들 서임식이 끝난 뒤, 광휘의 기사단에 들러 그들을 친히 축하하고 황실의 이름으로 만찬을 베풀러 가는 길이었던 것 같은데.

“슈테판 그린월 경이었지. 아주 훌륭한 기사더군.”

“광휘의 기사단 부단장에 손색이 없는 자입니다.”

카르넌과 말을 많이 섞고 싶진 않았지만, 슈테판의 칭찬이니 대꾸해 주었다.

“오늘 그를 보니 네게 슈테판 그린월을 호위로 붙여주었던 것이 다행이란 생각이 들더군.”

다행?
세리티안에서 요양하던 도로테아에게서 그를 불러올리고 호위를 아예 없애려고 했던 건 카르넌이 아니었던가.
분명 슈테판에게 보내온 편지에 황제의 재가가 내려진 것을 똑똑히 봤는데.
할 말은 많았지만 뒤에서 기다리는 신하들을 위해 하지 않기로 했다.

“…….”

“곧 기사단에서 만찬이 있을 것이다. 참석해도 좋다, 도로테아.”

카르넌은 도로테아에게 말했다.
카르넌은 데뷔탕트 이후, 도로테아를 눈여겨보고 있었다.
그녀는 여전히 귀족들과 어울릴 수 있는 자리에 나서지 않았다. 숫기가 없는 것 같다고, 카르넌은 생각했다.

‘나와 대화할 때도 늘 입만 다물고 있는 아이이니.’

기나긴 요양 탓일까? 도로테아는 평범한 황녀의 역할을 제대로 하지 못했다.
레이먼드와 적대적으로 황위 다툼을 하는 것보다는 낫지만, 그렇다고 저렇게 둘 수도 없는 법이다.
그래서 그는 친히 도로테아에게 자리를 마련해 주려고 했다.
그런데.

“아닙니다. 기사들이 기쁨을 나누는 자리에 제가 끼어서 무엇하겠습니까?”

도로테아는 그의 제안을 정중히 거절했다.
사람 많은 자리에 가기 싫을뿐더러, 그녀는 기사들이 지금까지 도로테아의 호위직을 얼마나 무시했는지 알고 있었기에 탐탁지 않았다.
그러고선 도로테아가 찾아가면 분명 또 가식적인 관심을 보이면서 아부를 해대겠지.
좀생이처럼 보일지 몰라도 그녀가 축하해 주고 싶은 것은 슈테판과 조이뿐이었다.
하지만 카르넌이 그녀의 마음을 알 턱이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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