폭군님은 착하게 살고 싶어 114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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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로테아는 뭔가 다른 할 말이 있는 듯한 그의 시선에 고개를 끄덕였다.

“무슨 일인데?”

“…….”

도로테아의 물음에 그는 조용히 그녀에게 손을 내밀었다.
그의 손 위에는 하얀 조개로 된 핀이 있었다.
도로테아가 선물한 이후, 그가 호위를 설 때 늘 가슴에 달고 있었던 핀이다.

“이건 왜? 이제 나한테 돌려주는 거야?”

슈테판과 수년 지내왔지만 이번엔 의미를 파악하기가 쉽지 않았다.
역시 오답이었는지 슈테판이 급히 고개를 저었다.

“그럼?”

“저…….”

‘슈테판이 말을 하려는 건가!’ 하고 도로테아와 클라라는 집중해서 기다렸지만 그의 입술은 답답하게 한참을 머뭇거렸다.
말 한마디 하는 게 뭐 그리 어려운지!
결국 슈테판의 시선이 훈장이 달린 가슴 쪽으로 향했다.
도로테아는 그제야 의미를 이해했다. 황녀님께서 친히 가슴에 달아달라는 뜻.

“그 훈장들 틈에 끼기엔 너무 초라하잖아.”

그녀의 걱정에 슈테판의 표정이 단호해졌다.
그의 눈썹은 조개 핀이 전혀 초라하지 않다고 강하게 주장하는 중이었다.

“이걸 언제까지 하고 다닐 생각이야?”

한 번 선물해 줬더니 빼지를 않으니.
그때의 꼬마가 자기가 만든 건 튼튼하다고 그렇게 자신 있어 했는데, 몇 년이 지났는데도 부서지거나 깨지지 않은 걸 보니 정말 튼튼하긴 한 모양이다.

“…….”

대답이 없는 슈테판의 눈은 ‘끝까지’라고 말하고 있었다.
이 조개 핀이 부서질 때까지.
만약 부서지지 않으면 무덤에도 같이 묻어달라고 할 생각인 듯했다.

“……내가 좀 선물을 못 챙겨줬지? 미안해, 슈테판.”

결국 슈테판의 고집을 이기지 못한 도로테아는 그의 가슴에 직접 핀을 달아주며 중얼거렸다.
이렇게 싸구려 핀에 의미 부여해서 오랫동안 간직하다니. 도로테아는 고마운 마음보다는 미안하고 짠한 마음이 들었다.
좀 더 좋은 것들로 많이 챙겨주고 했어야 했는데.
그러자 슈테판은 또 언제나처럼 착하게 고개를 저었다.

“아니긴 또 뭐가 아니야.”

이렇게 소중히 간직할 줄 알았으면 훈장들 틈에서도 독보적인 존재감을 발휘할 만한 멋진 보석을 선물해 줄걸.

“그래도 오늘은 슈테판에게 부끄럽지 않을 선물을 가져왔어.”

그녀는 오늘은 제대로 된 선물을 준비해서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도로테아가 박수로 신호를 보내자 밖에서 대기하고 있던 하인이 비싼 가죽으로 두른 선물을 가지고 들어왔다.
도로테아는 하인에게 건네받은 선물을 슈테판 앞에 내밀었다.

슈테판은 놀란 듯 멈췄으나 무릎을 꿇고 예를 갖춰 두 손으로 그녀의 선물을 받았다.

그의 손으로 내리는 묵직한 무게감.
도로테아의 허락에 따라 가죽을 풀어보니 검고 날렵한 칼집에 든 검이 모습을 드러냈다.
슈테판은 검을 보자마자 눈을 커다랗게 떴다.
장식 없이 투박하고 심플한 외형이었으나, 손잡이만 잡아봐도 손에 감기는 감촉이 다른 검들과 차원이 다름을 알 수 있었다.
모든 불필요한 것을 최소화하고 검의 본질에 집중한 완벽한 검이었다.

“명검 세터칼립스야.”

검의 진가를 알아보는 슈테판에게, 도로테아는 검의 이름을 알려주었다.
회귀 전, 명검을 수집하는 취미를 갖고 있던 그녀의 컬렉션에 있던 명검 중의 명검.
회귀 후에 그 취미는 즐기지 않았지만, 어떤 명검을 어떻게 구해야 하는지, 어느 검이 어떤 매력을 갖고 있는지 정도는 기억하고 있었다.

세터칼립스는 도로테아가 가장 좋아하는 검 중 하나였다.
투박한 탓에 보통 사람들은 왜 명검인지 몰라보는 일이 많지만, 아는 사람은 딱 보면 알 수 있다.
바위산을 가를 수 있는 검이라 불릴 만큼 강하고 단단한 검신, 완벽한 곡선과 비율.
그렇기에 세터칼립스는 오래 볼수록 아름다움이 느껴지고 질리지 않았다.

모든 게 절제된 가운데서도 검사가 원하는 것은 완벽히 갖추고 있는 신비한 검.
명검 가운데 실제로 사용하기에 가장 편한 것도 세터칼립스일 것이다.
그래서 도로테아는 슈테판에게 선물을 주겠다고 마음먹었을 때 다른 것은 볼 것도 없이 세터칼립스를 떠올렸다.

“슈테판이랑 가장 잘 어울리는 검이라고 생각했어.”

말없이 제 일에 충실한 슈테판과 가장 잘 어울리는 검.

“내가 내 기사를 위해 처음으로 내리는 검이야. 그러니까 꼭 받아줘.”

그에 슈테판은 검을 꽉 쥐었다가 고개를 한 번 끄덕였다.
* * *
도로테아는 서임식이 진행될 홀로 향했다.
조이의 얼굴도 보고 싶지만, 오늘 서임 받는 기사들은 서임식을 앞두고 엄격한 제식훈련이 한참이란다.
그 욕쟁이 감자가 각 잡힌 제식훈련을 한다니, 도로테아는 왜인지 모르게 입가에 웃음이 돌았다.

그리고 서임식이 진행되는 홀에 들어섰을 때, 도로테아는 자신에게 쏠리는 시선을 느꼈다.

“도로테아 밀라네어 황녀님!”

“안녕하십니까! 데뷔탕트 때 인사드렸던……”

“어머, 황녀님. 오늘도 정말 아름다우세요.”

순식간에 서임식을 위해 모여 있던 귀족들이 그녀에게 다가와 인사를 건넸다.

‘이럴 거면 레이랑 같이 올 걸 그랬어.’

레이먼드와 카르넌은 아마 황제와 황태자가 입장하는 식순에 맞춰 올 예정이다.
레이먼드는 그 식순에 맞춰 자신과 함께 서임식에 가지 않겠느냐고 제안했었는데 당연히 도로테아는 그를 거절했다.
황제나 황태자는 식순에 따라 중앙의 레드카펫을 밟고 입장하겠지만, 평범한 황족인 그녀는 귀족들 사이를 비집고 조용히 입장해야 할 테니까.

레이먼드의 표정을 보아하니 카르넌의 뒤를 이어 같이 입장하자고 할 것 같기도 했지만, 그건 더 싫었다.
하지만 인제 와서는 차라리 서임식이 시작되어 조용히 살금살금 들어오는 것도 좋았겠다 싶었다.
그랬으면 이렇게 가식적인 인사들을 받느라 기운 뺄 일은 없었을 텐데.

“다음 주에는 제가 지인들을 초대해 티 타임을 가질 생각인데, 황녀님께서도 와주시겠어요?

“고맙지만 제가 궁을 옮긴 지 얼마 되지 않아 아직 처리할 일이 많아서요.”

도로테아가 정중히 거절하자 옆에 있던 다른 귀족이 한마디 끼어들었다.

“아, 그럼 다음 달에 저희 가문에서 파티를 열까 하는데 황녀님께서도 참석해 주시면 영광스럽겠어요.”

도로테아는 몰려드는 초대에 난감하게 웃었다.
세리티안에서는 그래도 어리다, 몸이 좋지 않다는 핑계로 초대를 거절했었는데 이제는 핑곗거리도 없다.
이 추세라면 도로테아는 람파스에 있는 모든 귀족과 만나기 전까지는 쉴 수 없을 것 같았다.
그때.

“황녀님.”

그녀를 부르는 부드러운 목소리에 도로테아의 고개가 습관처럼 돌아갔다.
테온 프리드였다.

‘테온도 참석했구나…….’

“아까 레이먼드 전하께서 찾으시던데, 여기 계셨군요.”

레이가 날 찾았다고? 도로테아가 의아한 듯 고개를 갸웃하자 그가 웃었다.

“급한 용건인 것 같았는데, 서임식 시작 전에 뵙고 오시죠.”

“알았어.”

“제가 안내해 드릴게요.”

테온은 그녀를 데리고 서임식이 이루어지는 홀의 뒤편으로 빠져나왔다.
도로테아는 그의 뒷모습을 물끄러미 바라보며 뒤를 따랐다.
데뷔탕트 이후 며칠 지나지 않았는데, 그가 이전과는 다르게 느껴졌다.

‘테온이 어둠의 정령을 다룰 줄 안다니…….’

도로테아는 그의 머리카락이 부드럽게 흔들리고, 그녀의 보폭에 맞춰 한 발자국 정도 앞서나가는 그의 배려를 응시하며 생각했다.
전혀 눈치채지 못했었다.
레이먼드를 잃고 절망할 때도, 하루하루 그가 죽어갈 때도 그녀는 바보처럼 저를 사랑해 주지 않는 것만을 탓했다.

원망할 자격이 있는 건 테온이었는데.
도로테아에게는 알아차릴 기회가 얼마든지 있었다.
밤마다 그의 방을 찾아가면 반기는, 무서울 정도로 짙은 어둠.
그 가운데서 초가 타는 냄새가 났던 것을, 도로테아는 테온이 방금 촛불을 끄고 자는 척 외면하는 것이라고 착각했다.

하지만 아마 초는 실제로도 타고 있었을 것이다. 다만 어둠의 정령들이 그 빛을 집어삼켰을 뿐.

프리드의 힘이 강해지는 밤이면 테온은 그 무서운 어둠 속에서, 통제되지 않는 힘을 방출하며 제 숨통을 조여오는 것을 조금이라도 늦추려 애썼던 것이다.
게다가 그가 죽인 새들. 도로테아가 선물한 유리온실과 아름답고 희귀한 새들이 비극을 맞이한 날에도 테온은 자신의 힘에 절망을 느꼈을 것이다.

‘이래도 저를 사랑하십니까?’

아름다운 새들이 죽은 날, 그는 그렇게 물었다.
테온은 대체 어떤 심정으로 그렇게 물었던 걸까?
그 속에 어린 깊은 절망을, 도로테아는 이기적으로 해석하며 제대로 읽어내지 못했다.
그에 대해 제대로 알지 못했으면서 감히 그를 사랑했다고 말할 수 있을까?
도로테아는 자신이 없었다.

그녀는 이기적이어서 무지했다. 레이먼드에게도, 테온에게도, 에단에게도.
그때, 테온의 걸음이 멈췄다.
주위엔 아무도 없었고, 시끄럽던 귀족들도 없어 조용했다.
도로테아는 레이를 찾아 고개를 두리번거렸다.

“레이는?”

“아……. 곤란해 보이시는 것 같아서, 레이의 이름을 잠깐 빌렸어요.”

테온이 겸연쩍게 말했다.
아, 나를 위해서 그런 거였구나.

“혹시 제가 괜한 일을 벌였나요?”

“아니, 아니야. 고마워.”

“데뷔탕트 이후로는 처음 뵙네요.”

“으응…….”

도로테아는 그와 적당히 거리를 둔 채 괜히 가슴에 달아둔 브로치를 만지작거렸다.

‘제가 드린 힘으로 황녀님은 테온 프리드를 곁에 둘 수 있게 될 거예요.’

에단은 정령석의 힘을 가리켜 그리 말했다.
이 힘으로 그녀는 테온을 살릴 수 있을 것이고, 어쩌면 그와 약혼을 할 빌미가 될 수 있을지도 모른다.
테온을 곁에 둘 기회.
그럼에도 도로테아는 왠지 그 기회를 잡기 위해 손을 뻗기가 망설여졌다.

‘마음을…… 겨우 정리한 뒤여서 그럴까?’

손수건도 연고 병도 그에게 모두 넘겨주고 홀가분하게 털었다고 생각했다.
기나긴 짝사랑을 정리하고 이제야 겨우 조금 담담해졌다.
그가 줄리아와 손을 잡고 있어도 적당히 웃어넘길 수 있는, 추억 같은 쓰라림만이 느껴질 뿐이었다.
테온 프리드가 나를 좋아하지 않는다고 클라라에게 말할 수도 있는데……. 이제야 다시 그를 붙잡을 힘이 생기다니.

도로테아는 그를 소심하게 올려다보았다.
회귀 전, 도로테아에게 별로 관심도 없던 그가 흔쾌히 그녀의 데뷔탕트 파트너를 맡았던 이유를 이제는 알 것 같았다.
도로테아에게 관심도 없던 카르넌이 갑자기 그녀와 테온의 약혼을 추진했던 이유도 이제는 안다.
카르넌답지 않게 그녀가 좋아하는 남자와 약혼을 이토록 적극적으로 밀어주는 게 이상하다고 생각했었는데.

‘정략결혼이니 사랑이 없는 결혼이라는 건 일찍부터 알았지만…….’

그가 자신과 결혼한 이유가 레이먼드였다는 건…… 조금 슬픈 일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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