폭군님은 착하게 살고 싶어 113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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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른 새벽, 슈테판은 어슴푸레한 공기를 가르며 홀로 검을 휘두르고 있었다.
상대는 없지만, 이렇게라도 몸을 움직이지 않으면 안 될 것 같았다.

‘자네를 부단장으로 임명할까 하네.’

바로 어제, 광휘의 기사단 단장 아서가 한 말 때문이었다.
기사단장 아서는 그동안 슈테판의 공로를 높이 사 부단장의 자리를 주고 싶다고 했다.
하지만 슈테판이 그 이면의 뜻을 모를 리 없었다.

‘황녀님 때문이겠지.’

도로테아의 데뷔탕트 날, 그를 비꼬던 기사들의 말이 맞았다.
도로테아의 지위가 격상된 만큼, 그녀를 오랫동안 보필해 온 그를 올려주려는 것이다. 승급 시험도 따로 없이, 특례로.
그때, 슈테판은 그의 뒤에서 달려드는 기척을 느끼고 검을 휘둘렀다.
챙, 부딪치는 소리와 함께 상대가 뒤로 밀려났다.

“윽, 손목 나가겠네…….”

“……!”

검을 든 채 욱신거리는 손목을 만지작거리는 건 도로테아였다.
슈테판은 너무 놀라 검을 집어넣고 그녀를 살폈다.

“괜찮아, 슈테판.”

도로테아는 손을 내저으며 슈테판에게 괜찮다고 설득했지만, 슈테판은 안절부절못하며 그녀의 손목을 살폈다.
습관적으로 기사들 상대하듯 거칠게 내쳤으니, 도로테아가 바닥에 나가떨어지지 않은 것만으로도 다행이었다.

“역시 오래 쉬었더니 실력이 예전 같지 않네.”

도로테아는 뻐근한 손목을 풀어내며 웃었다.
회귀 전엔 이즈음이면 기사들과 견주고도 남을 만한 실력을 갖추고 있었는데, 이렇게 무뎌졌을 줄이야.
훈련을 안 한 만큼 약해지고, 노력한 만큼 강해지니 몸은 참 솔직하다.

“그런데 새벽부터 나와서 연습이라니. 무슨 고민 있어, 슈테판?”

“…….”

당연히, 도로테아는 답을 들을 거라고 기대하고 물은 건 아니었다.
원래 말이 없는 슈테판이 고민을 털어놓을 리 없겠지.
도로테아는 웃으며 검을 집어넣었다.

“기사단 승급 때문이지?”

어차피 그의 고민이 무엇인지는 이미 알고 있다. 말하지 않았을 뿐, 그녀는 자기 사람의 일 정도는 이미 꿰고 있다.
역시 그녀의 추측이 맞았는지 슈테판이 눈을 크게 떴다.
슈테판이 부정하지 않으면 대체로 긍정.

“들었어. 부단장 후보로 지명됐다고.”

그녀가 궁을 옮기면서 보필하는 인력도 곧 크게 개편이 있을 예정이다.

슈테판의 부단장 임명은 그 개편 중 일부다.

“좋은 일인데, 왜 그렇게 얼굴이 어두워?”

부단장으로 임명되면 일단 도로테아의 호위를 보지 않아도 된다.
호위는 개인 시간이 없을 만큼 하루를 모두 바쳐야 하는 데다가, 퍽 지루한 일이었다.
특히나 사교 활동이나 대외적인 일에 잘 나서지 않는 도로테아의 호위라면 더더욱.
부단장이 되면 그는 개인 시간도 생길 것이고, 기사단 내에 행사할 수 있는 영향력이나 결정권도 늘어날 것이다. 게다가 봉급도 크게 오르고 명예도 얻을 수 있다.
그러나 그 좋은 소식에도 슈테판은 물끄러미 도로테아를 바라보기만 했다.
도로테아는 그의 검은 눈동자를 마주하며 웃었다.

“뭔가 찜찜해?”

도로테아의 질문에 슈테판의 눈동자가 살짝 동요했다.

“내 뒷배로 올라가는 것 같아서?”

그녀가 웃으며 묻자 그는 부정하지 않았다.
이번 임명엔 그의 실력보다는 도로테아의 지위 향상의 영향이 더 컸으니까.
정정당당하지 못한 방법으로 부단장에 오르게 되는 것 같았다.
평생 신념을 지키며 올곧게 살려고 노력한 그에게는 받아들일 수 없는 결정.
도로테아는 언제나처럼 우직하기 그지없는 슈테판의 모습에 어쩔 도리가 없다는 듯 웃었다.

“내 뒷배로 올라가는 게 아니라, 지금까지 내게 발목을 묶여 있었던 거야, 슈테판.”

도로테아가 그의 고민을 정정해 주자 슈테판이 고개를 저었다. 그녀에게 발목을 묶인 적 없다고, 말하고 있었다.
참, 회귀 전이나 회귀 후나 하나밖에 모르는 사람.
도로테아는 충심이라는 말로 부르기엔 너무 따뜻한 그의 행동이 좋았다.
이번 생에 슈테판을 만나게 된 건 손에 꼽을 만큼 큰 행운이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개인적인 감상일 뿐.

“나, 바보 아니야. 슈테판도 조이도 나 때문에 기사단에서 무시당했던 거 이미 다 알고 있어.”

변변찮은 황녀 지키면서 기사단에서 은근하게 평가절하되었던 걸 모를 리 없다.
도로테아의 호위는 기사들이 기피할 정도로 박한 자리였다.

기사들은 도로테아의 호위를 맡는 것보다 차라리 험한 외부로 나가 공이라도 세울 기회가 있는 걸 더 좋아했다.
때문에 슈테판과 조이는 늘 능력 부족으로 밀려난 취급을 받았다. 도로테아가 각성하기 전까진.

“만일 슈테판이 황제 폐하나 레이를 모셨다면 더 빨리 부단장이 됐을걸.”

“…….”

도로테아의 말이 정곡을 찌르자 슈테판은 입을 꾹 다물고 고개만 숙였다.

“나는 내가 슈테판의 발목을 잡지 않게 되어서 다행이라고 생각해.”

회귀 전이었다면 그는 이미 부단장이 되어 있어야 했다. 여러 전투에서 공을 세우고, 레이먼드의 호위도 맡으면서 능력을 인정을 받았을 시간.

“이제야 기회가 온 거야, 슈테판.”

지금까지 슈테판은 매년 치른 기사단 훈련이나 실력 점검에서 빠지지 않고 우수한 결과를 보여왔다.
게다가 단 한 번도 꾀부리는 일 없이 우직하게 도로테아를 지켜온 것 또한 기사로서 높이 평가되었다.
황실에 대한 충성심을 증명하기에 그의 성실함보다 좋은 건 없었다.

그러니까, 이 기회는 슈테판 스스로 만든 기회다.
하지만 슈테판은 여전히 입을 다물고 그녀를 빤히 보았다. 여전히 마음에 걸리는 게 있어 내키지 않는 듯한 얼굴.
도로테아는 왜 그런지 이해하지 못하고 그의 눈을 살피다 조금 늦게 그 이유를 깨달았다.

“……내가 걱정돼?”

“…….”

그의 무뚝뚝한 반응에 도로테아가 웃었다.

“슈테판 말고 이제 다른 기사들도 호위로 배정될 텐데 걱정할 필요가 뭐 있어?”

슈테판이 꿍한 얼굴로 입술을 꾹 물었다.
지금까지 도로테아의 호위 자리를 거들떠보지도 않던 기사들이 이제야 그녀의 호위로 배정된다는 게 마음에 들지 않는 것이다.

“조이도 있는걸.”

조이는 아직 알지 못하지만, 곧 있을 신임 기사 서임식에서 조이는 기사 작위를 받게 될 것이다.
그리고 슈테판의 뒤를 이어 도로테아의 호위직에 배정되겠지.

“그러니까 내 걱정은 말고 기사로서 다른 임무를 해봐도 좋아. 슈테판이 나를 아끼는 만큼, 나도 슈테판을 아껴. 그래서…… 슈테판이 더 잘됐으면 좋겠어.”

도로테아가 웃었다.
세리티안 별궁으로 요양하러 간 아홉 살의 도로테아가 데뷔탕트를 치를 때까지 그는 그녀의 곁을 지켰다.
무려 십 년. 황녀 하나에게 묶여 있기엔 그의 재능이 아까울 만큼 긴 시간.

“분명 슈테판이 잘 되어가는 걸 보면서 조이나 나를 위해 봉사하는 기사들도 꿈을 꿀 수 있을 거야. 그리고 우리 완전히 헤어지는 것도 아니잖아.”

어차피 황실에 봉사하는 광휘의 기사단이니, 황족인 그녀와는 자주 마주칠 것이다.
큰일이 있지 않은 한 황궁에서 일할 것이고 때로는 그녀 가까이서 호위를 맡을 일도 있겠지.

“그러니까 좀 더 나아가도 괜찮아. 나도 슈테판과 같이 나아가고 있을 테니까.”

그에 슈테판은 도로테아를 묵묵히 쳐다보았다.
그의 허리께에도 닿지 않을 만큼 작던 아이가 어느새 그의 가슴 높이까지 자라 있었다.
레이먼드의 편지를 읽지 않던 그녀는 이제 레이먼드와 편하게 대화했고, 카르넌은 점차 그녀에게 관심을 두기 시작했다.
그녀 곁을 지키게 될 새기사 조이가 있고, 빛의 정령도 있다.

부서질 듯 여린 몸으로 색색거리는 숨을 뱉던 도로테아는 이곳에 없다.
걸음마 떼는 아이를 지켜보듯 불안하기만 했던 도로테아 밀라네어는 단단해졌다.

상처가 없지는 않겠지만, 더 이상 우는 그녀를 품에 안을 일은 없을 것이다.
슈테판은 깨달았다. 그가 도로테아에게 묶여 있는 동안, 그녀는 나아가고 있었음을. 그 자리에 머물러있던 건 도로테아가 아니라 자신이었음을.

그러니 그녀는 슈테판으로부터 독립을, 아니, 슈테판이 도로테아 밀라네어로부터 독립할 때가 온 것이다.
그를 깨달은 슈테판은 커다란 손으로 도로테아의 머리를 부드럽게 쓸어주었다.
자그마하던 어린아이가 이렇게나 컸는데, 나는 왜 그녀를 여전히 홀로 둘 수 없는 여린 아이로만 보고 있었을까.
조용히 도로테아를 눈에 담은 그는 무뚝뚝한 입가에 옅은 미소를 띠었다.

“감사합니다, 황녀님.”

그동안 당신의 곁을 무사히 지킬 수 있게 해주셔서. 이 부족하고 답답한 기사를 지금까지 믿어주셔서. 당신을 떠나는 것이 두렵지 않도록, 아름답고 멋지게 자라주셔서.
지금까지 감사하다는 말을 좀 더 많이 해야 했는데, 뒤늦게서야 도로테아에게 표현하는 자신의 입술이 조금 미웠다.
도로테아는 그런 슈테판을 올려다보다가 부드럽게 미소했다.

“나도 고마웠어, 슈테판.”

* * *
광휘의 기사단의 서임식은 황궁에서 가장 넓은 메인홀에서 치러졌다.
큰 행사에 나서는 걸 좋아하지 않는 도로테아지만 이번 서임식만큼은 먼저 나서서 참석했다.
오늘 서임식에서 슈테판의 부단장 임명과 조이의 서임이 이루어지기 때문이다.
그녀는 서임식 시작하기 전에 시간을 내어 슈테판을 찾아갔다.

“슈테판 기사님! 너무너무 잘 어울리세요! 이제는 부단장님이라고 불러야 하나요?”

같이 온 클라라가 새 제복을 입은 슈테판을 보고 호들갑을 떨었다.
하지만 도로테아는 이번 호들갑만큼은 기분 좋게 들어주기로 했다.
클라라의 말대로 슈테판에게 제복이 참 잘 어울렸으니까.
어깨가 직각으로 넓게 뻗어 있고, 등도 넓은데다가 근육으로 잘 잡힌 몸은 제복을 소화하기에 안성맞춤이었다.

“멋있어, 슈테판. 역시 부단장 되라고 하길 잘했네.”

도로테아가 클라라의 호들갑에 한마디 거들자 슈테판은 조금 부끄러웠는지 머쓱하게 눈을 돌렸다.

“와아, 제복에 달린 훈장들 좀 봐요!”

클라라는 슈테판의 가슴에 달린 번쩍거리는 훈장을 가리켰다.
슈테판은 연달아 쏟아지는 칭찬에 대답은 못 하고 입술을 옴짝거렸다.
전투나 공을 세운 건 전부 도로테아 호위 이전의 옛날 것들이고, 그 외에는 대체로 성실함이나 충성도를 치하하는 의미의 훈장들이었다.
그 가운데엔 어린 시절 납치되었던 도로테아를 찾아 람파스로 데려왔던 공로를 치하하는 훈장도 있었다.

‘부단장 임명자치고는 훈장이 많은 편도 아닌데…….’

그는 민망한 듯 가슴에 달린 훈장을 쓸다가 도로테아와 눈이 마주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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