폭군님은 착하게 살고 싶어 107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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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폐하, 일단 편하게 자리하시고 말씀 나누시지요.”

한편 로버트는 들어오자마자 문 앞에 서서 에단에게 질문세례를 퍼붓는 카르넌을 말렸다.
그가 보기에도 젊은 청년을 문전에서 압박하는 모습이 불안했기 때문이다.
그는 응접용 소파로 카르넌과 손님을 안내한 뒤 다과를 내오도록 했다.
그러나 카르넌은 자리를 옮기고도 에단에게서 눈을 떼지 않았다.
그는 천천히 차를 한 모금 마신 뒤 브론테 공작과 에단을 뜯어 살피듯 보았다.

“세리티안에서 도로테아와 가까이 지냈다면 알지도 모르겠군.”

카르넌이 찻잔을 내려놓으며 입을 뗐다.

“세리티안에서도 도로테아가 정령의 힘을 발현한 적이 있나?”

그에 공작이 에단의 눈치를 보며 먼저 입을 열었다.

“별궁에 같이 갔던 아랫사람들이 더 잘 알지 않겠습니까?”

“다들 아무 생각이 없는 건지, 아니면 정말 몰랐던 건지 전혀 몰랐다고 해서 말이네.”

“저도 전혀 모르던 일이라 깜짝 놀랐습니다.”

“에단 브론테, 자네는?”

카르넌은 조용히 깍지 낀 손을 무릎 위에 올려놓은 채 신문하듯 에단을 응시했다.
그러자 에단이 잠시 기억을 되짚는 듯 시선을 비스듬하게 떨구더니 입을 열었다.

“저도 기억상 황녀님이 정령을 다루는 건 본 적이 없습니다. 데뷔탕트 때가 처음이었습니다.”

떨림 없이 깨끗하고 여유 있는 목소리에 카르넌의 눈이 가늘어졌다.

“정말인가?”

같은 질문을 되묻는 일이 없던 카르넌이 다시 한번 대답할 기회를 주었다.
그는 데뷔탕트 때 에단 브론테를 기억하고 있었다.
어둠 속에서 도로테아의 빛이 퍼져 나왔을 때, 이미 알고 있었다는 듯 미소를 띠며 도로테아를 바라보던 그 얼굴을.

“어떻게 황제 폐하의 앞에 거짓을 말씀드리겠습니까?”

“대담한 자라면, 가능하겠지.”

카르넌이 몰아세웠으나, 에단의 입가에는 당황한 기색은커녕 미소가 번졌다.

“저는 어린 시절 도로테아 밀라네어 황녀님을 보아왔던 벗이자 모시는 이로서, 황녀님이 염원하던 정령의 힘을 각성하신 것이 기쁠 뿐입니다.”

마치 좁은 틈을 빠져나가는 고양이처럼 그는 유연하게 카르넌의 질문에 답했다.
카르넌은 그의 태도가 여전히 마음에 걸렸으나, 증거가 있는 것도 아니기에 더 묻지 않았다.

“허허, 맞습니다, 폐하. 도로테아 황녀님이 세리티안에 머물던 시절, 에단과 얼마나 가까이 지내셨는지 모릅니다. 당시엔 황녀님도 에단도 서로에게 둘도 없는 벗이었지요.”

공작은 에단과 도로테아의 사이를 적극적으로 어필했다.
이때를 위해, 에단을 도로테아에게 적극적으로 투자했던 게 아닌가!
도로테아에게 잘 보이려고 공작 부인의 저항을 무릅쓰고 에단을 파티와 사교모임에 데려가지 않았던가!
그렇게 일찍부터 도로테아에게 투자했는데, 인제 와서 다른 귀족들에게 가까운 자리를 빼앗길 순 없었다.

“전해 들으셨겠지만, 황녀님께서는 세리티안에 머물 당시 다른 영애와 영식들의 방문은 늘 거절하시면서도, 에단은 별궁에 불러 함께 시간을 보내곤 하셨답니다.”

에단을 이런 자리에 내보내는 걸 내켜 하지 않았던 공작 부인마저도 공작의 옆에서 호호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 옆에 앉아 있던 조나단은 황제와 브론테 부부의 관심을 독차지한 에단을 보며 이를 꽉 깨물었다.
카르넌을 알현한 후 줄곧 그는 꾸어다 놓은 보릿자루 신세가 되어 있었다.

‘나를 소개하러 온 것 아니었느냐고!’

그는 오늘 들뜬 마음으로 이 자리에 왔다.
이제 막 에피스테메를 졸업한 그에게 카르넌과의 만남은 아주 중요한 자리였다.

그는 공작이 본격적으로 관직에 나아갈 그를 위해 이 자리를 마련했다고 생각했다.
황제에게 눈도장을 찍고, 장차 어떤 자리로 나아갈지 미리 알아보는 기회.

그는 아버지가 황제 폐하 앞에 제 칭찬과 추천을 해주길 기대했었다.
그런데 그의 찻잔이 세 번 비워질 때까지 카르넌과 공작 부부는 에단에만 정신이 팔려 있었다.
딸그락, 조나단은 다소 신경질적으로 빈 찻잔을 컵 받침 위에 올려놓았다.
그러자 공작 부인이 그의 허벅지를 몰래 툭 쳤다.

황제 폐하 앞에서 찻잔을 소리 나게 내려놓다니 교양 없게!
말로 하지는 않았지만 매서운 눈총에 조나단은 더욱 화가 났다.
그는 공작 부인과 눈을 마주치곤 자신의 가슴을 툭툭 쳐 보였다.

‘저 좀 신경 써주셔야 하는 거 아닙니까!’

브론테의 장남은 나인데, 반반한 얼굴로 황녀 좀 꼬셨다고 저 자식한테만 정성을 들이다니!
그제야 공작 부인은 자신이 조나단을 너무 오랫동안 기다리게 했다는 걸 깨달았다.

“큼큼, 황제 폐하. 그리고 저희 조나단도 에단 못지않게 훌륭하고 듬직한 인재랍니다.”

브론테 부인은 목을 가다듬고 뒤늦게 조나단에게로 관심을 돌렸다.

“이번에 에피스테메를 졸업하였지요.”

“황태자와 동갑이었던가?”

“아니요, 전하보단 나이가 많습니다.”

“졸업이 늦었군.”

카르넌의 말에 공작 부인과 조나단의 표정이 움찔했다.

“아무래도 에피스테메 졸업은 다들 좀 여유 있게 하는 편이니까요.”

졸업 시험에 낙제해서 미뤄진 것을, 공작 부인은 열심히 포장했다.

“앞으로 폐하를 극진히 모시며, 브론테의 차기 가주로서 람파스에서 많은 경험을 쌓고 싶습니다……!”

참다못한 조나단이 용기 내어 말했다.
그러자 카르넌의 푸른 눈동자가 차갑게 조나단을 향했다.

“람파스는 브론테의 차기 가주 양성소가 아니네.”

“……!”

카르넌의 냉정한 반응에 조나단은 얼굴이 새빨갛게 달아올랐다.
그러자 옆에 있던 에단이 작게 픽 웃더니 조용히 차를 마셨다.
에단 앞에서 무안을 당한 조나단은 이를 꽉 깨물면서도 카르넌 앞에 함부로 입을 열지 못했다.
* * *
브론테 일가는 카르넌의 알현이 끝나고 밖으로 나왔다.

“훌륭하구나, 에단.”

공작은 황제에게 성공적으로 인상을 남긴 에단의 어깨를 두드리며 웃었다.
에단이 본 공작의 모습 중에서 가장 기뻐 보였다.

“두 분이 저를 아껴주신 덕분이죠.”

에단은 가식적으로 곱게 웃으며 말하곤 옆에 있는 조나단에게로 시선을 돌렸다.
그는 방금의 알현이 무척 불만족스러웠는지, 표정을 굳힌 채 에단을 노려보고 있었다.

‘에피스테메를 졸업하고 꽤나 으스댈 시기인데, 참 안됐네.’

에단은 그렇게 생각하며 조나단에게도 싱긋 웃어 보였다.

“형님도 고마워요. 덕분에 람파스에도 와봤어요.”

그에 조나단의 얼굴은 더욱 험상궂게 구겨질 따름이었다.

“그러고 보니 에단, 네가 어릴 때 얼마나 람파스에 가고 싶다고 졸라댔는지 아느냐?”

“제가요?”

공작의 말에 에단이 모르는 척 물었다.

“조나단이 에피스테메에 들어간 게 부러웠는지, 아니면 내가 제도에 왔다 갔다는 게 신기했는지는 몰라도, 어릴 때 람파스에 가고 싶다고 했었지.”

공작은 오랜만에 옛날 일을 떠올렸다. 그러자 공작 부인도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에피스테메에 보내달라고 울면서 조르니까, 어쩔 수 없이 허락도 해줬었잖니.”

“기억나요.”

에단은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도로테아가 세리티안에 내려오지 않았던 어린 시절. 그는 도로테아를 만나겠다는 일념으로 브론테 부부에게 몇 번이나 부탁했었다.

평소에 조르는 것이 없는 그의 유일한 소원이라며, 눈물을 흘려보기도 하고 어린애처럼 칭얼거려 보기도 했다.

그 덕분에 여덟 살 때 에피스테메 시험을 보러 람파스로 떠날 수 있었다.
하지만 운이 나쁘게도 람파스로 올라오는 길에 마차 사고가 났고, 그는 다리가 부러질 정도의 부상을 입었다.
에피스테메 시험 일정에도 늦은 데다가 몸까지 다쳤으니 그는 람파스에 닿기도 전에 다시 세리티안으로 내려와야 했다.

“그때 시험을 못 본 걸로 거의 일 년 넘도록 우울해해서 얼마나 마음이 아팠는지.”

“그랬던 네가 이렇게 커서 바라던 람파스에 왔으니 얼마나 좋으냐.”

공작의 웃음에 에단은 조용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자 공작 부인은 에단을 조나단의 곁에 서도록 살짝 밀치며 입을 열었다.

“에단도 데뷔했고 조나단도 졸업했고, 이제 둘 다 어엿한 어른이 되었으니 앞으로는 다투지 말고 잘 지내야 한다.”

공작 부인이 두 사람을 붙여놓으며 말했다.
아무리 다툴지언정 기댈 곳은 형제뿐이니 서로가 서로를 도와 브론테 가문을 잘 이끌어 가야 한다고.

‘꿈이 너무 크시네, 우리 어머니.’

에단은 공작 부인의 말에 미소를 지으며 답하면서 생각했다.
그녀는 이제 계산이 선 것이다.
장남이자 그녀의 아들인 조나단은 당연히 브론테 가문의 가주가 될 것이다. 그리고 에단 브론테는 황녀와 결혼해 황실의 일원으로 자리를 잡는 것이다.
그렇게 되면 황실과 연이 있는 에단은 조나단에게 든든한 지원군이 되어줄 수 있었다.
하지만 그럴 수 있을 리가.
욕지거리를 내뱉지 못해 화를 삭히고만 있는 조나단의 얼굴만 봐도 답이 나올 텐데.

‘나도 그럴 생각은 없고. ……그럴 수도 없고.’

그는 주머니에 있는 브로치를 만지작거렸다.
그의 시선은 무의식중에 동쪽으로 향했다.
도로테아가 있는 콘베르타 궁.
황궁까지 왔는데, 그녀 얼굴 한 번 보지 못하고 돌아가는 것이 아쉬울 찰나.

“오오! 도로테아 밀라네어 황녀님!”

브론테 공작이 큰 목소리로 도로테아를 불렀다.
에단은 본능처럼 고개를 돌려 공작의 시선을 따라갔다. 그의 말대로 도로테아가 그곳에 있었다.
그녀의 얼굴을 보자마자, 간신히 숨이 트이는 듯했다.
그러나 역설적으로 가슴이 답답해졌다.
에단이 그 자리에서 얼어붙어 있는데, 공작이 먼저 나서서 도로테아에게 다가갔다.

“브론테 공작…….”

“마침 황녀님께도 한 번 인사를 드려야겠다 하던 차였는데! 아, 우리 에단도 함께 왔습니다.”

공작은 에단에게 빨리 와서 도로테아에게 인사하라며 손짓했다.
에단은 도로테아와 눈을 맞췄다.

“……안녕하세요, 도로테아 황녀님.”

“안녕, 에단.”

에단은 그녀와의 인사 후, 무슨 말을 해야 할지 알 수 없었다.
도로테아에게는 마지막 끝을 담담하게 마무리하는 척했지만, 그는 도로테아를 당분간 만날 자신이 없었다. 그리고 분명 도로테아도 그를 불편해할 것이었다.
두 사람이 어색하게 마주 보고만 있자 브론테 공작이 상기된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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