폭군님은 착하게 살고 싶어 104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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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끄러운 가운데 에단은 조용히 도로테아를 바라보았다.
사람들은 줄곧 그녀를 위해 축하 인사와 칭찬을 건넸지만 그녀는 한 번도 입을 뗀 적이 없었다.
그녀는 관조자처럼 가만히 귀족들을 살펴보고 있었다.
귀족들은 잔을 하나씩 들어 술을 채웠고, 네레우스는 도로테아에게도 잔을 건넸다.
도로테아가 가만히 네레우스를 쳐다보자 네레우스가 웃었다.

“다들 황녀님을 축하하고 있습니다.”

결국 도로테아는 순순히 그 잔을 받아 들었다.
에단도 옆에 있던 하인이 건넨 잔을 받아 들고는 도로테아의 표정을 살폈다.
분명, 그녀는 이 상황이 마음에 들지 않는 것이다. 한순간에 태도를 바꾸고는, 자기들끼리 수습하려고 애쓰는 이 상황이.
서둘러 그녀가 겪은 나쁜 기억들을 지워내고 그 기억들이 아무것도 아닌 것처럼 웃음으로 무마하려는 이 상황이.

“황녀님, 이 축배의 주인공이니 한 말씀 하시죠.”

네레우스가 웃으며 축사를 권하자 사람들이 고개를 끄덕이며 그녀의 축사를 기다렸다.
도로테아는 제 손에 들린 가식적인 술잔을 쳐다보다가 생긋 웃었다.

“모두, 제 일을 마치 자기 일처럼 축하해 주셔서 정말 고맙습니다.”

그녀는 조용히 잔을 들고는 사람들을 둘러보았다.

“그만큼 기쁜 날이니 오늘은 지금까지 절 무시했던 만큼만 마시세요.”

그렇게 말한 도로테아는 천천히 술을 들이켰다.
붉은 와인이 서서히 그녀의 입술 안쪽으로 타고 들어가더니, 한 방울도 남김없이 사라졌다.
그리고 그녀가 빈 잔을 내려놓았을 때, 사람들은 얼어붙은 채 그녀를 바라보고 있었다.
도로테아를 무시했던 만큼만 마셔라.

그렇다면 대부분의 이가 술잔 하나쯤은 가뿐히 비울 수 있을 텐데, 이상하게도 술잔이 하나도 비워지지 않았다.
도로테아는 당혹감에 어쩔 줄 모르는 귀족들을 보며 생긋 웃었다.

“농담이에요. 다들 그렇게 정색하며 굳을 줄은 몰랐네요.”

그때 피식, 도로테아의 옆에서 웃음소리가 들렸다. 내내 그녀를 걱정하던 에단이었다.

“정정하겠습니다. 저를 축하하는 만큼 실컷 축배를 드시기를.”

도로테아의 말에 굳었던 분위기가 겨우 풀어졌다.
사람들은 일제히 그녀에게 축하를 외치며 술을 들이켰다.
에단은 그런 그녀를 보며 조용히 케이크 접시 하나를 내밀었다.
포가 만들었다는 케이크였다.
하얀 생크림 체리와 블루베리, 딸기와 복숭아가 알록달록 어우러져 있었다.

“언제 챙겼어?”

“케이크가 나오자마자. 과일은 최대한 다양하게 얹어진 부분으로 챙겨뒀어요.”

.
그의 한쪽 손엔 홍차도 들려 있었다.
케이크는 알겠는데 홍차는 왜?

도로테아가 그의 홍차를 쳐다보자 그가 아직 채 비지 않은 그의 술잔을 가리켰다.

“축사가 너무 찜찜해서요.”

“아, 그건…….”

“농담이에요. 케이크에 술을 곁들이는 건 질색이거든요. 황녀님도 홍차 한 잔 드릴까요?”

당황하는 도로테아에 에단이 웃음을 터뜨렸다.
도로테아는 그제야 안도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하지만 아주 우연히도 에단은 데뷔탕트가 끝날 때까지 술잔에 손을 대지 않았다.
* * *
아직 데뷔탕트가 끝나지 않았음에도, 도로테아가 정령의 힘을 각성했다는 소식은 삽시간에 퍼졌다.
데뷔탕트에 참석했던 귀족들은 하인을 시켜 자신의 가문에 이 급한 소식을 전하게 했다.
그리고 당연히 황궁에도 도로테아의 일이 빛처럼 빠르게 전해졌다.

“도로테아 황녀님이?”

광휘의 기사단에 있던 기사들은 소문을 듣자마자 슈테판을 쳐다보았다.
경비가 따로 있는 데뷔탕트에는 호위 기사가 굳이 필요하지 않았으므로, 그는 황궁에서 도로테아의 무도회가 끝날 때까지 대기 중이었다.

“궁전도 더 큰 곳으로 옮기신다더군. 황제 폐하께서 직접 명령하셨대.”

“와우. 이거 잭폿이 터지셨군, 슈테판 경.”

기사들은 부러운 눈으로 슈테판에게 말했다.
도로테아의 지위가 오르는 만큼 슈테판의 지위도 올라갈 것은 자명한 일이다.

“역시 인생은 한방이야. 편하게 시골 내려갔다 왔다가 바로 이렇게 승급이라니.”

슈테판의 귀에 투덜대는 기사들의 소리가 들렸다.
지금까지 도로테아의 호위 기사 자리가 나도 아무도 지원하지 않았으면서, 희망도 없는 궂은 자리를 지키는 그를 비웃었으면서, 이제는 그의 자리가 편했단다.
슈테판은 그런 그들에게 호응하고 싶지 않아서 입을 다물고 그저 묵묵히 검을 챙겼다.
다른 사람들은 부러워하지만 그에게는 달라질 것도 없었다.
늘 그렇듯 그가 하는 일은 도로테아의 곁을 지키는 일이었으니.
다만 조금 기쁜 일이 있다면.

‘황녀님께 정령의 힘이 생겼다니…….’

그가 모시는 분이 더 좋은 곳으로 간다는 것. 사람들에게 인정받는다는 것.
슈테판은 이제 그녀에게도 따스한 빛이 비치지 않을까 생각했다.
그는 늘 도로테아에게 편안한 자리가 생기기를 바랐으니까.

“슈테판 경, 근데 저게 무슨 소리예요? 황녀님한테 정령의 힘이 생겼다니?”

한편 조이는 아직 상황 파악을 하지 못하고 물었다.
정령의 힘이 생긴 게 좋은 것 같기는 한데 딱히 감이 오지는 않았다.
정령의 힘이 생긴다고 해서 갑자기 도로테아의 성격이 변하거나, 완전히 다른 사람이 되는 것도 아닐 텐데.
게다가 도로테아에게 좋은 일이 생겼는데 왜 전혀 상관없는 기사들이 난리지?

“…….”

슈테판은 복잡한 관계를 정확히 설명해 주기는 어려워서 조이를 조용히 쳐다보았다.

“알았어요, 클라라 하녀장님께 여쭤볼게요.”

슈테판의 눈빛만으로도 조이는 무슨 말인지 알아차렸다.

그러자 한참 입을 다물고 있던 슈테판이 입을 뗐다.

“네게도…… 좋은 일일 거다.”

“아, 당연하죠! 우리 황녀님이 잘되셨다는데! 안 그래도 포한테 알려서 사과파이를 만들라고 할 생각이었어요. 축하 파티를 해야죠!”

조이가 엄지를 척 올려 보였다.

‘그게 아닌데…….’

조이는 이 일이 그저 도로테아에게 좋은 일이 생겨서 신나게 축하할 수 있는 기쁜 일 정도로 생각했다.
아직 종자인 그녀가 어쩌면 정식 기사로 승격될 수 있는 기회라는 것도 모르고.
슈테판은 조금 더 설명을 해주려다가 입을 다물었다.
혹시 모르니 괜히 기대하게 할 필요는 없지.

게다가 이미 기뻐 보이니, 오늘 조이는 충분히 행복할 것이다.
* * *
데뷔탕트가 끝나고, 도로테아는 에단과 함께 마차에 올랐다.
화려하고 북적거렸던 데뷔탕트의 소음들이 멀어지고, 이내 다그닥거리는 말발굽 소리와 바퀴가 덜컹거리며 구르는 소리만이 들렸다.
요란한 파티가 어지럽혔던 것들이 하나씩 잠잠해지며 정돈되자 생각과 감정이 서서히 한 곳으로 향했다.

도로테아는 에단에게, 에단은 도로테아에게.
그럼에도 두 사람은 오랫동안 말이 없었다.
에단은 맞은편에 앉은 도로테아를 보았다.
도로테아는 하고 싶은 말을 입안에 머금고 있는 듯 붉은 입술을 다문 채 그에게 시선을 향하고 있었다.
아직 정령에 대해서도, 과거에 대해서도 그녀는 하고 싶은 말이 많을 것이다.

하지만 그녀는 망설이고 있었다.
에단은 그 까닭을 알았다.
그래서 도로테아에게 말을 걸지 못하고, 둘만의 공간에서 침묵했다.
하지만 결국은 마주해야 할 일.

“편하게 말씀하세요, 황녀님.”

에단은 먼저 그 문을 열었다.
그러자 도로테아의 입술이 무겁게 열렸다.

“……사실 네가 원망스러워, 에단.”

침묵 속에 에단이 고백한 과거를 떠올리며, 하나씩 또렷해진 감정들.
에단도 그 이야기가 나올 줄 알았는지 가만히 그녀의 원망을 들었다.

“네가 테온의 비밀을 숨기지 않았더라면, 그렇게 되진 않았을 텐데.”

그녀가 레이먼드를 죽일 때도 그는 테온의 비밀을 알고 있었다.
이따금 테온의 방을 찾아갈 때 마주한 어둠도, 날마다 야위어 가는 그의 모습도, 에단은 상사병 때문이라 말했다.
그가 평생 그녀를 속여왔다는 사실이, 그리고 그 때문에 벌어진 모든 일이 그녀를 혼란스럽게 했다.

만약 그가 테온의 비밀을 숨기지 않았다면. 지난 생의 비극도 없었을 텐데.

“……왜 이제 와서 솔직하게 말해준 거야?”

도로테아는 그가 원망스러움과 동시에 궁금했다.
그는 그 사실을 영원히 비밀로 묻어둘 수 있었을 것이다.
어쩌면 테온의 비밀을, 레이먼드가 죽은 뒤에 알게 되었다고 거짓말할 수도 있었다.
아니, 에단이라면 분명히 그렇게 해야 했다.
늘 자신에게 유리하게 말을 꾸며 사람을 제 편으로 만들던 사람이니까.

굳이 불리한 일을 솔직하게 고백하지 않는 사람이니까.
실수라고 넘어가기에도 어설픈, 지나친 솔직함은 도로테아를 당혹스럽게 했다.
에단은 원망만큼이나 큰 의문을 가진 도로테아를 응시하며 입술을 떼었다.

“황녀님이 그 죄의 무게에 짓눌려 무너져 가는 걸 봤으니까요.”

에단이 말했다.

“황녀님의 죄가 아니라는걸, 레이먼드 황태자 전하를 죽인 것도, 테온 프리드를 죽인 것도 전부 제 탓이라는 걸 아시길 바랐어요.”

그는 그의 죄로 그녀의 죄가 덜어지기를 바랐다.
그는 떨리는 도로테아의 눈을 보며 쓰게 웃었다.
사실 말하지 않았을 뿐 그는 어렴풋이 알고 있었다.
어쩌면 오늘이 도로테아의 곁에 있는 마지막 기회가 될지도 모른다는 걸.
그래서 데뷔탕트가 끝나고 마차에 오른 이후 이 숨 막히는 적막이 어쩌면 끝을 예견하고 있을지도 모른다는 걸.

“옛날과 달라진 건, 황녀님만이 아니에요.”

도로테아가 황제의 삶에 실패했듯이, 에단은 도로테아에게 사랑받는 삶에 실패했다.
도로테아가 레이먼드를 죽이며 테온을 잃었듯, 그는 테온을 죽이며 도로테아를 잃었다.
그러므로 도로테아가 황제의 삶을 포기했듯이, 그는 도로테아의 옆자리도 포기할 수 있었다.
도로테아를 위하여.

“황녀님을 살리기 위해선, 테온 프리드를 먼저 살려야겠죠.”

그는 알고 있었다.
그가 죄를 고백함과 동시에 도로테아는 테온을 붙잡을 수 있는 기회가 될 것임을.
어둠의 힘에 잠식되어가는 테온에게, 이제 도로테아는 빛의 힘을 나눠줄 수 있었다.

“제가 드린 힘으로 황녀님은 테온 프리드를 곁에 둘 수 있게 될 거예요.”

이제 테온은 도로테아를 필요로 할 것이고, 또한 도로테아를 증오하며 죽어갈 일도 없을 것이다.
그리고 도로테아는 기쁘게 살 것이다.
에단 브론테가 주지 못하는 웃음을 테온 프리드는 줄 수 있었으니.
그러니, 오늘의 데뷔탕트는 그에게 주어진 마지막 시간이나 다름없었다.

‘파트너에게 가장 기억에 남을 무도회를 선물해야 한다는 게 제 신조거든요.’

그는 그가 할 수 있는 가장 아름다운 모습을 꾸미고 그녀를 맞이했다.
비단 정령의 힘을 가져서만이 아니라, 그의 손을 잡는 마지막 하루에 조금이라도 행복이 있기를.
그와 함께 춤을 춘 시간이, 그와 함께 이야기를 나눈 시간이, 귀족들에게 무시당하지 않은 하루가 조금은 기억에 남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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