폭군님은 착하게 살고 싶어 103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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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는 걱정 좀 해.”

아무리 그래도 자기 바로 아래 황녀가 정령의 힘을 각성했다는데 이렇게 헤프게 풀어져 있어서는.

“어휴, 당연히 걱정하지! 늑대 같은 놈들이 이제 너한테 득달같이 달려들 텐데. 사교계엔 속이 시커먼 놈들이 많으니까 조심해야 돼, 도로시.”

“레이.”

“도로시.”

레이먼드는 걸음을 멈추고 그녀를 돌아보았다.

“그렇게 심각할 필요 없어, 도로시. 그냥 정령의 힘이 생긴 거, 그뿐이야. 복잡하게 생각하지 마.”

그는 딱딱하게 굳은 도로테아를 향해 어깨를 으쓱하며 웃었다.
그때 도로테아는 멀리서 기다리고 있던 에단을 발견했다.

“저 녀석은…….”

“레이, 나 잠시 에단과 이야기 좀 하다가 들어갈게.”

“……알았어, 도로시.”

레이먼드는 에단을 한번 쳐다보고는 데뷔탕트가 진행 중인 무도회장으로 들어갔다.
레이먼드가 사라지자 에단은 조심스럽게 그녀에게 다가왔다.

“폐하께선…….”

“에단. 나는 황제가 될 생각, 없어.”

도로테아는 먼저 말을 꺼냈다.
그에 에단의 눈동자가 갈피를 잡지 못하고 흔들렸다.

“하지만 이제 황녀님도 정당한 자격을 갖추셨어요.”

에단은 그녀의 손을 붙잡았다.
이제 그는 도로테아를 평생 괴롭힌 그 힘을 줄 수 있었다.
그녀가 받던 무시와 모멸을 갚고, 모두가 그녀를 우러러보게 할 수 있었다.
이제 그녀가 황제가 되어도, 정당성을 들먹이며 가로막을 이는 없을 것이다.
하지만 도로테아는 이미 마음을 정한 듯 담담한 눈으로 그를 마주했다.

“에단, 너도 기억한다면 알잖아. 내겐 자격이 없어.”

이미 한 번 많은 사람을 고통받게 했다.
레이먼드를, 줄리아를, 테온을, 많은 백성을, 그리고 에단과 도로테아 그들까지도.
그런데 이제 와서 그걸 모른 척 눈 감고, 다시 황위를 욕심내는 건 가당치 않은 일이었다.
그러자 에단이 다시금 그녀를 설득하려 했다.

“그건 한 번의 실패였을 뿐이에요.”

누구나 한 번쯤 실패할 수 있다.
실패를 양분 삼아 더 나은 성공을 이뤄내면 되는 것이다.
이제 그녀에겐 성공의 모든 조건이 갖춰졌고 나아가기만 하면…….

“미안, 에단. 이제 내겐 황위의 무게가 너무 무거워.”

도로테아는 고개를 저었다.
황제가 되기 위해 걸어 나가야 할 길, 그리고 황제가 된 후 감당해야 할 무게를 떠올리면 숨이 막힐 것 같았다.
단지 양심 때문에 하지 못하는 게 아니라, 그 길을 다시 걸을 용기가 없었다.

에단은 조용히 그의 바람을 거절하는 도로테아를 보았다.
미안하다고 하는 그녀 앞에, 뭘 더 말할 수 있을까.

“……분명 황제가 되고 싶다고 하실 줄 알았어요.”

전생에는 그랬으니까.
정령의 힘을 갖고 싶어 괴로워했으니까.

“이 힘을 얻고 기뻐하실 거라고 생각했어요.”

그는 도로테아가 정령의 힘을 얻게 된 것에 기뻐하며 그의 마음을 알아주길 바랐다.
하지만 그녀는 그가 준비한 가장 좋은 선물마저 거절했다.

“……전부 쓸모없는 일이었군요.”

그는 주먹을 꽉 움켜쥐었다.
그녀에게 줄 수 있는 모든 걸 했다고 생각했는데, 이마저도 그녀에겐 필요가 없었다.
나는 대체 당신께 무엇을 바치려 했는가.
당신을 위해 무엇을 해야만 했는가.
도로테아는 그런 그에게 묵묵히 정령석을 내밀었다.
그가 정령석을 그녀에게 준 이유를 알고 있기에, 그녀는 이를 돌려줄 수밖에 없었다.
그녀는 그의 바람을 들어주지 못할 테니까.

“정령석은…….”

도로테아가 정령석을 돌려주려 하자 에단이 고개를 저었다.

“언젠가 필요한 일이 생기실 거예요.”

어차피 그녀를 위해 찾은 돌이었으니 돌려받을 필요가 없었다.
그가 바친 무의미한 노력의 결실.
그는 그것 하나만큼은 도로테아가 받아주기를 바랐다.
그리고 언젠가 에단 브론테가 핏줄을 남기지 않은 채 죽으면, 룩스와의 계약 권한은 그녀에게로 넘어갈 것이다.
그로서 도로테아의 피는 위대한 정령의 근원이 될 것이다.

“제가 오늘 이렇게 큰일을 벌여 버려서, 다들 황녀님께 정령을 보여달라고 할 테니까요.”

에단은 자신이 저지른 일에 대한 수습으로 생각해 달라고 말했다.
그때 마침 데뷔 서클의 끝을 알리는 종소리가 울렸다.

연회 만찬의 시작이었다.
에단은 차분히 표정을 갈무리하고 생긋 웃었다.
아무 일도 없던 것처럼.

“케이크, 드시고 가셔야죠.”

그는 자신의 데뷔 파트너에게 팔을 내밀었다.
* * *

“레이!”

레이먼드가 먼저 데뷔탕트 볼로 돌아왔을 때, 줄리아가 기다렸다는 듯이 그에게 달려갔다.

“테온은?”

레이먼드는 돌아오자마자 테온의 상태를 살폈다.
데뷔 서클 도중에 벌어진 갑작스러운 소등은 테온 때문이었다.
아침부터 컨디션이 좋지 않던 테온이 간신히 붙잡고 있던 정령의 힘을 통제하지 못하고 놓친 것이다.

“이제 괜찮아. 아까 황녀님의 정령 덕분에 해소된 모양이야.”

줄리아는 레이먼드를 데리고 테온이 있는 곳으로 갔다.
테온은 무도회 한쪽에 놓인 낡은 의자에 지친 듯 앉아 있었다.

“테온, 괜찮아?”

“레이. 미안…….”

테온은 자신이 소란을 일으킨 것에 미안해하고 있었다.
레이먼드가 올 때까지 참으려고 했는데, 데뷔 서클에 오른 도로테아를 보는 순간 잠시 긴장이 풀어졌던 것일지도.

“아니야. 다행히 다들 그 일엔 관심도 없는걸.”

“그러고 보니 황녀님은? 그 정령의 힘……. 정말 황녀님이 맞아?”

“응, 나와 폐하의 힘은 아니었으니까.”

“그럼…….”

“도로시의 궁을 옮기기로 했대. 더 좋은 곳으로. 아마 사람도 새로 뽑겠지.”

레이먼드가 테온의 곁에 앉으며 말했다.
그러자 줄리아가 테온과 함께 눈치를 잠깐 보다가 다시 입을 열었다.

“너는 괜찮아, 레이?”

“나? 뭐가?”

“난 정령의 힘에 대해 잘 모르지만 도로테아 황녀님의 힘, 엄청 강해 보였거든.”

“맞아. 폐하와 내 힘을 합친 것보다 더 강하겠지.”

레이먼드는 고개를 끄덕였다.
점점 옅어진 밀라네어의 피에 기대어 간신히 정령을 불러내는 그와 달리 도로테아의 힘은 최초의 밀라네어를 떠올리게 할 정도로 강했다.

“그러니까 내 말은…….”

줄리아가 머뭇거리자 레이먼드가 웃었다.

“다들 나를 걱정하네.”

“당연하지. 나만이 아니라 데뷔탕트에 모인 사람들이 다들 그 얘기뿐이야.”

“뭘 걱정하는지는 알겠는데, 그렇게 걱정할 필요 없어, 줄리아.”

“도로테아 황녀님이 욕심이 없다고 장담해, 레이?”

“아니, 그건 모르겠어.”

레이먼드는 어깨를 으쓱했다.
그가 아는 도로테아는 늘 신중하고 조심스러운 사람이지만, 그렇다고 황위에 전혀 욕심이 없나 하면 그것도 아닌 것 같았다.
그녀는 레이먼드의 황태자 자리, 그리고 카르넌의 황제 자리에 늘 예민하게 반응하곤 했으니까.
게다가 똑똑하고 능력도 좋으니 정령의 힘이 있다면 황제가 되어도 이상할 게 없다.

“그런데 어떻게 그렇게 태평한 거야?”

줄리아는 고개를 갸웃하며 물었다.

“도로시가 황위에 욕심이 있는지 없는진 몰라도, 내 마음은 잘 아니까.”

“네 마음?”

줄리아의 되물음에 그는 씨익 웃을 뿐이었다.

“그나저나 테온, 이제 그럼 내가 도와주지 않아도 괜찮겠어?”

레이먼드는 말을 돌렸다.
그때, 닫혔던 무도회장의 문이 다시 열렸다. 정령 사건으로 떠들썩했던 무도회장이 순식간에 조용해졌다.
도로테아와 에단의 재입장이었다.

데뷔탕트 시작 때도 그들의 입장에 무도회장이 조용해졌으나, 지금의 정적은 그때와 분위기가 사뭇 달랐다.

호기심이나 흥미가 아닌 팽팽한 긴장감.
그러나 도로테아와 에단은 변함없이, 그 누구에게도 시선을 주지 않고 무도회장을 지나 아까 그들이 서 있던 구석 자리에 멈춰 섰다.
귀족들은 한동안 가만히 두 사람을 지켜보았다.
누가 먼저 말을 걸지 서로 눈치를 보았다.

도로테아와 에단은 나란히 선 채 대화도 하지 않고 다소 가라앉은 표정으로 서 있기만 했다.
분명 들떠서 들어올 거라고 생각한 귀족들은 도도하게 서서 입을 다물고 있는 두 사람을 보고 수군거렸다.
하지만 조용한 두 사람에게 먼저 다가갈 용기가 없어서 서로 눈치만 보기 바빴다.
그리고 그 묘한 긴장감을 먼저 깨고 선을 넘은 것은.

“아주 화려하고 멋진 데뷔였습니다, 황녀님.”

네레우스 폰스였다.

“정령을 다룰 줄 알면서 지금까지 숨겨 오셨군요.”

그는 웃고 있었지만 심사가 뒤틀린 것이 빤히 보였다.

“숨긴 건 아니고, 사고였습니다.”

“사고라니요. 갑자기 모든 불을 끄고 빛의 정령을 펑 터뜨리셨는데. 정말, 정말 인상 깊었습니다. 너무 밝아서 눈이 멀 뻔했다니까요?”

“…….”

“황녀님의 데뷔는 아마 사교계에 대대손손 회자될 겁니다.”

칭찬인지 비꼬는 건지 알 수 없는 미묘한 말투로 네레우스가 말했다.
그가 말을 걸자 다른 귀족들도 용기를 얻었는지 그녀에게 접근했다.

“황녀님이 정령을 다룰 줄 아는 것도 모르고 아까 제가 실례되는 질문을 한 건 아닌지요.”

“역시 황녀님께서 정령을 다루지 못할 리 없는데, 이렇게 서프라이즈로 사람들을 놀라게 하실 줄이야, 하하!”

어떤 이는 자신이 무례하게 굴었던 것을 사과하기도 했고, 어떤 이는 뻔뻔하게 그녀를 믿었다고도 했다.

“데뷔 서클이 중간에 끊겨서 어떡해요……. 딱 황녀님이 빛나던 차례였는데.”

“두 분 춤 추는 모습이 너무 아름다웠는데, 한 번 더 서클에 올라가 보여주세요.”

아까까지만 해도 가볍게 툭툭 던지던 말투는 이제 겸손을 덧입고 도로테아의 눈치를 보기 바빴다.
그들은 카멜레온처럼 재빠르게 색을 바꾸는 걸 무례나 비양심적인 행동이 아닌, 사교계에 유연하게 적응하는 것이라고 생각하고 있었다.
맞는 말일지도 모른다.
이곳에서는 칼을 들이밀던 적이 순식간에 한 팀이 되기도 하고, 평생을 함께할 것 같던 사람이 뒤통수를 치기도 하는 곳이었으니까.
그들에게 일관된 태도를 기대하는 것이야말로 한심한 일이지.
마침 만찬이 시작되며 술과 음식들이 안으로 들어왔다.

“그럼 우리 도로테아 황녀님을 위해 건배라도 해야 하지 않겠습니까?”

네레우스가 도로테아를 응시하며 귀족들에게 묻자 모두가 한쪽에 있던 레이먼드에게로 시선을 돌렸다.
도로테아를 위해 축배를 들어도 되겠느냐고, 허락을 구하는 눈빛.

‘이런, 정말 다들 하는 생각이란.’

레이먼드는 제게 쏠린 시선에 속으로 중얼거렸다.
사람들은 마치 약속이라도 한 듯 레이먼드와 도로테아의 관계를 ‘대립’으로 이해하고 있었다.
레이먼드는 도로테아를 위해 흔쾌히 미소를 지으며 술잔을 집어 들었다.
그의 허락에 귀족들이 환호하며 박수를 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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