폭군님은 착하게 살고 싶어 102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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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약 그가 정말 권력을 위했다면, 애초에 도로테아가 아닌 레이먼드의 옆에 붙었을 것이다.
착하디착한 레이먼드는 서출을 차별하지 않으니, 달콤한 혀로 그를 꾀어내면 괜찮은 자리 하나는 차지했을 것이다.
재상까지는 오르지 못할지 몰라도, 반역의 칼을 드는 것보단 안전하고 편한 길이었겠지.

하지만 도로테아는 그 명백한 진실조차 외면한 채 에단의 말을 간신의 말로 해석했다.
우습지. 무너져 가는 황제를 보며 눈물 흘리는 간신이 어딨단 말인가.
폭군을 끌어내기 전, 미리 계획을 알리고, 마지막까지 살아달라고 애원하는 간신이 어딨단 말인가.
하지만 도로테아는 끝까지 눈을 가렸다.

에단은 그런 도로테아에게 사랑을 고백할 수 없었다. 에단 또한 그녀를 잘 알고 있었기에.
테온이 있는 한, 그가 도로테아의 심장에 자리를 얻는 일은 없으리란 걸 잘 알고 있었기 때문에.
그녀에게 자신의 진심을 자각하게 하는 순간, 그녀의 곁에 있을 수 없다는 걸 알기 때문에.

“황녀님은 기억하지 못했다면 좋았을 텐데…….”

에단은 모든 걸 기억하고 있는 그녀의 눈동자를 보았다.
그녀에게만큼은 이 삶이 완전한 새 삶이었다면 좋았을 텐데.
그렇게만 된다면, 그는 백지처럼 하얀 그녀의 삶 위에 아름다운 것만을 그려줄 수 있었을 것이다.
그리고 테온 프리드의 자리에 자신의 이름을 새겼으리라.

마음껏 그녀를 끌어안고, 사랑한다 말하고, 입을 맞추고, 웃음을 선물할 수도 있었겠지.
그는 조용히 그녀의 손을 잡았다.
그의 손이 닿자 그가 도로테아의 손에 쥐여 주었던 정령석이 더욱 영롱하고 밝게 빛났다.
그가 도로테아에게 정령석을 건넨 것은 이번이 두 번째.
에단은 도로테아가 이번만큼은 그의 헌신을 받아주기를 바랐다.

“저의 유일한 황제 폐하. 다시 높은 곳에 오르세요.”

그녀의 탐욕이 아닌 희망이 피어오르길 바라며.
* * *

“도로테아!”

그녀는 곧장 카르넌에게 불려갔다.
아직 데뷔탕트가 끝나지 않았지만, 이미 사람들의 관심은 모두 도로테아에게 쏠렸다.

카르넌은 당혹스러운 것 같기도 했고 화가 난 것 같기도 했다.

“정령을 다룰 수 있었던 것이냐?”

그가 목소리를 높이며 물었다.
도로테아는 아무런 대답도 하지 못한 채 주머니 속에 있는 정령석을 쥐었다.
그녀 역시 정리되지 못한 것은 마찬가지였다.

“도로테아 밀라네어!”

카르넌은 생각에 잠긴 채 대답하지 않는 그녀를 다시 한번 불렀다.
도로테아는 큰 소리에 눈을 들었다.

“왜 숨겼지?”

카르넌은 도로테아에게 물었다.

“……숨긴 게 아닙니다.”

“그럼 오늘 갑자기 네 힘이 발현했단 말이냐?”

카르넌의 질문에 도로테아의 입이 다시 막혔다.
대체 뭐라고 말해야 할까?

‘저를 이용하세요, 황녀님.’

에단의 목소리가 아직까지 머릿속에 뜨겁게 맴돌았다.

‘이 정령석을 가지고 계신다면, 제 힘을 빌리실 수 있을 거예요.’

계약자는 에단이지만, 정령석은 그 힘의 매개가 되어준다.
에단과 가까이, 최소한 같은 람파스 안에만 있다면, 그녀는 정령석을 통해 그의 힘을 빌려 얼마든지 정령을 불러낼 수 있었다.

‘좀 더 빨리 드리지 못한 저를 용서하세요.’

에단은 그녀에게 사죄했다.
그는 일찍이 어린 도로테아가 각성한 척 꾸며볼까도 생각했었다.
조금이라도 빨리 정당성을 주고 싶었기에.
그는 네레우스 앞이나 던컨 백작 부인의 살롱에서 도로테아가 각성한 척 연출해 볼까도 고민했었다.
하지만 도로테아가 각성했다는 것이 알려지면 카르넌은 그녀를 람파스로 불러올릴 테고, 에단은 더 이상 그녀의 곁에서 정령을 지원해 줄 수 없었다.

정령석이 있더라도 람파스에 있는 그녀를 먼 세리티안에서 도울 수는 없으니.
그럼 결국 카르넌은 다시 힘을 발현하지 못하는 도로테아를 의심할 테고, 도로테아는 더욱 괴로워졌겠지.

‘단 한 번의 실수도, 하고 싶지 않았어요.’

치밀한 그는 인내를 갖고 완벽한 때를 기다렸다.
황제 카르넌과 내로라하는 귀족들이 직접 두 눈으로 보고 도로테아의 힘을 믿을 수 있는 곳.
아무도 그녀의 힘을 의심하지 않을 곳.
그곳이 바로 데뷔탕트였다.
도로테아는 그가 준 이 힘의 의미를 곱씹었다.

‘에단은 나를 다시 황제로 만들고 싶어 해.’

에단은 이 힘만 있다면 그녀가 정당한 황제가 될 수 있다고 속삭였다.
어쩌면 그럴지도 모른다.
도로테아가 레이먼드에게 밀려났던 가장 큰 이유는 정령을 소환하지 못했기 때문이니까.

밀라네어의 자격이 없어서.
하지만 다시 황위를 노리는 게 옳은 걸까?
황제가 되기 위해선 레이먼드를 밀어내야 한다. 그를 깎아내리고, 황태자의 자리에서 폐위시키고 올라서야 한다.

‘……나는 못 해.’

빛의 정령이 있더라도, 다시 그 길을 걸을 용기가 없었다. 더는 레이먼드를 향해 칼을 들고 싶지 않았다.

“설명을 해 봐라, 도로테아.”

“……저도 어떻게 된 건지 잘 모르겠습니다.”

도로테아는 정령석을 놓고 바르게 섰다.

“모른다?”

카르넌의 미간이 짙게 구겨졌다.

“저도 모르는 사이 갑자기 벌어진 일이었습니다.”

도로테아는 자신을 낮추기로 했다.
정령의 힘이라곤 써본 적도 없는 그녀지만, 에단이 보여준 그 힘이 카르넌과 레이의 힘보다는 훨씬 강하다는 것쯤은 알 수 있었다.
그 힘을 온전히 갖고 있다고 말하는 건 너무 위험했다.

“고민하지 말고, 일단 보여봐라.”

“예?”

“다시 정령을 불러내 봐.”

카르넌은 그녀를 시험해 보겠다는 듯 예민한 눈으로 그녀를 보았다.
도로테아에게 낯선, 아주 깊고 짙은 관심이었다.
도로테아는 속으로 조소했다.
정령이 있으니 눈빛이 달라지는구나.

“못하겠습니다, 폐하.”

오기일까?
황위 욕심도 정치적 욕심도 버린 그녀는 당당히 고개를 저었다.
그러자 카르넌의 미간이 다시 구겨졌다.

“아까 데뷔 서클에서 했던 대로만 해.”

“못합니다, 폐하.”

도로테아는 손을 내리고 카르넌을 응시했다.
그러자 카르넌이 눈을 지그시 감고 화를 삭이듯 크게 심호흡했다.

“온 신경을 집중해.”

카르넌은 자신이 직접 정령을 불러내어 시범을 보였다.
도로테아는 그에 웃음이 터질 뻔한 걸 입술에 힘을 주고 참았다.
위대하신 황제 폐하에서 나를 위해 친히 정령을 불러내 주시다니. 정말 상상도 못하던 일이다.

“폐하, 제게 정령의 힘이 있는 것이 중요합니까?”

도로테아가 물었다.

“어차피 황태자는 레이먼드고, 제 정령의 힘은 굳이 쓸 일이 없을 겁니다.”

가끔 연례행사 때 황족으로서 선보이거나, 빛의 정령왕을 위해 치르는 예식에 참석할 수는 있겠지.
하지만 결국 빛의 정령이 실질적으로 쓰이는 곳은 없다.
그러자 카르넌이 차가운 표정으로 그녀를 보았다.

“최소한 밀라네어가 끝났다는 소리는 듣지 않겠지.”

“밀라네어가 끝났다고요……?”

“정령의 힘이 끊겨가는, 기울어가는 황실이라는 소리를 듣지 않아도 된단 소리다.”

정령을 불러내지 못하는 밀라네어는 위대한 황실의 붕괴점이었고, 멸망의 시초였고, 쇠락의 기원이었다.
그렇기에 카르넌은 도로테아가 빛의 정령을 다룬다고 착각하고 한편으로는 안도한 것이다.
자신이 밀라네어의 종말을 낳은 것이 아니라고.

앨리스가 죽어가며 낳은 아이가 밀라네어의 끝은 아니라고.

“너 또한 그걸 바라진 않겠지.”

카르넌이 냉정한 눈으로 그녀를 응시했다.
그의 말대로 도로테아는 그걸 바라지 않았다.
하지만 그건 그저 바람일 뿐. 비극적이게도 그녀는 밀라네어의 종말이 맞았다.
그녀의 죽음 뒤, 정령은 에단 브론테라는 새 계약자를 찾았다.
밀라네어는 그녀에 의해 덧없이 저물었다.
도로테아는 저도 모르게 헛웃음을 터뜨렸다.
카르넌은 그런 도로테아를 보고 미간을 구겼다.

“네겐 이 문제가 가벼워 보이는 것이냐?”

“……전혀요.”

이 문제를 세상 누구보다 무겁게 짊어지고 있는걸.

“그 무게를 안다면 정령의 힘이 얼마나 중요한지도 알겠지.”

“…….”

“앞으로 레이먼드를 통해 정령의 힘을 다루는 법을 배우도록 해라. 되도록 빨리, 레이먼드의 시간을 너무 빼앗지 말고.”

카르넌은 대답 없는 도로테아를 흘끔 보았다.
앨리스를 빼닮은 도로테아였지만, 그는 그녀가 대체 어떤 생각을 하는지 읽을 수가 없었다.

“그리고 네 궁전을 레나스코르 궁으로 옮길 것이다.”

카르넌은 가장 외진 곳에 있던 콘베르타 궁에서 조금 더 넓고 새로운 레나스코르 궁으로 도로테아를 옮겨주기로 결정했다.
사용인의 수도 늘어날 것이고, 담당 기사와 마차 등도 한 층 더 격상될 것이다.

“지금부터는 제대로 된 밀라네어로서 제 몫을 해야 할 거야.”

제대로 된 밀라네어.

“그동안 저는 제대로 되지 못한 밀라네어였군요.”

카르넌은 그제야 말실수를 알아차렸는지 표정을 굳혔다.
아니, 말실수라고 할 것도 있나. 사실이겠지.

“내 말은.”

“폐하의 뜻은 잘 알겠습니다.”

도로테아는 마치 카르넌이 입을 연 걸 모른 척 말을 끊고 고개를 숙였다.
* * *

“도로시!”

그녀가 카르넌을 만나고 나오자마자 레이먼드가 그녀에게 달려왔다.

“얼마나 놀랐다고!”

그는 활짝 웃으며 도로테아를 꽉 껴안았다.

“나는 믿었어! 네게도 정령의 힘이 있을 거라고! 도로시, 정말 축하해!”

그는 흥분한 목소리로 몇 번이나 도로테아를 축하했다. 감격해서 목이 메는 것 같기도 했다.
그녀의 힘이 그에게는 위협이 될 수도 있는데 어떻게 저렇게 좋아할 수가 있을까?
도로테아는 한없이 순수하고 맑은 그의 기쁨에 같이 웃지 못했다.

“이거 놔, 레이…….”

“폐하께선 뭐라고 하셔?”

“내 거처를 레나스코르 궁으로 옮길 거래.”

“뭐야! 진짜 잘됐잖아!”

레이먼드는 제 일보다도 더 기뻐했다.
레나스코르궁이면 황후 앨리스가 사용했던 여러 궁 중 하나로, 지금 도로테아가 머무는 곳보다 훨씬 크고 넓고 화려하다.
카르넌은 앨리스의 죽음 후, 그녀가 쓰던 궁들을 오랫동안 비워두었는데, 도로테아가 그 빈 궁전을 채우게 된 것이다.

“도로시, 아까 네가 정령을 불러냈을 때 사람들 표정 봤어? 특히 네레우스 표정. 정말 끝내줬는데.”

레이먼드는 네레우스의 떡 벌어진 입을 보고 얼마나 통쾌했는지 모른다고 말했다.

“네가 나간 후에 사람들이 다 네 얘기만 했어. 게다가 네 힘 엄청 강했잖아. 나와는 비교도 안 될 정도로.”

“……레이먼드. 말해두지만 그 힘은 내가 하고 싶어서 한 게 아니야.”

도로테아는 걸음을 멈추고 그에게 말했다.
분명, 에단은 고의적으로 빛의 정령을 연출했다. 사람들에게 보란 듯이 화려하고 극적으로.
도로테아는 그 힘이 혹여 레이먼드와 카르넌의 의심을 살까 걱정됐다.
압도적인 힘을 전시하여, 제 지위를 올려보려는 정치적인 수로 오해한다면…….

“알아, 도로시.”

“뭐?”

“너도 엄청 놀라 보였는걸.”

레이먼드는 빙그레 웃으며 도로테아의 머리를 가볍게 쓰다듬었다.

“걱정할 필요 없어.”

널 믿으니까.
투명한 그의 눈동자가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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